「천주교회보」의 창간과 일제시대 한국교회의 활동
『本報는 左의 세가지 要求에 應하야 出生하였으니 一은 南方敎區내의 消息報道요 二는 敎會發展에 대한 意見交換이요 三은 步調一致 이것이외다』(天主敎會報 1927년 4월 1일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中에서)
1927년 4월 1일자로 일단의 청년들이 월간지로 펴낸 「天主敎會報」는 당시 민족 전체의 문맹률 80%, 천주교 신자의 수적 비례, 그리고 교구의 교세 등을 감안할 때 거의 만용에 가까운 열성이었다. 당시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조선과 동아, 교계에서는 경향신문과 경향잡지가 창간되는 등 활발하게 언론이 생겨나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1895년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1910년 한일합방까지 연평균 7%에 가까운 교세 신장률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해방 전까지 신자 증가율은 2.73%로 급격히 떨어졌다. 이는 일본의 교회 활동 억압에 크게 기인했다.
1930년을 전후해 활발하게 펼쳐진 교회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가톨릭청년」, 「별」, 「가톨릭연구」 등과 함께 창간된 「천주교회보」는 그후 53년 「가톨릭신보(新報)」, 54년 「가톨릭시보(時報)」 그리고 다시 80년 「가톨릭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33년 교회내의 기존 청년 잡지를 통폐합, 「가톨릭청년」을 창간한다는 취지로 「천주교회보」는 1949년 복간까지 16년간의 긴 공백기간을 갖게 된다.
분단시대의 개막과 한국교회(1945~1962) 광복과 교회
일제의 악랄한 압제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은 마침 「성모승천대축일」이었다. 교회는 민족과 함께 한국 교회의 주보인 성모님의 선물로써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각종 축하와 기념미사를 거행했다. 이와 함께 교회에서는 일제말에 휴간된 경향잡지, 경향신문, 가톨릭청년 등이 속간됐고 「천주교회보」도 1949년 4월 1일 다시 발간됐다.
남한 교회는 해방된 민족에 대한 봉사를 다짐하면서 복음 전파 뿐만 아니라 교육운동, 사회사업 등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통한 간접 선교에 노력했다. 또 교회내 청년 운동과 가톨릭 액션이 본격화돼 1949년 8월 2일에는 「대한천주교총연맹」을 결성했다. 하지만 날로 발전하는 남한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혹심한 탄압이 가해졌다. 공산정권 수립 직후 교회에 대한 탄압과 성직자 및 지도급 신자들을 투옥했으며 6·25 직전에는 성직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를 단행했다.
민족 상잔의 비극과 전후 한국 교회
6·25는 한국교회 전반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전쟁 기간 중 교회는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와 지도급 신자들을 잃었다. 「천주교회보」도 그해 6월부터 10월까지 휴간했다. 『敵軍의 侵入으로 말미암아 慘酷한 변을 당하신 모든 戰災교우들에게 대하여 本 主敎는 哀痛한 同情의 눈물을 禁치 못함과 동시에 이번에 당한 苦難이 우리 민족이 과거에 범한 罪과와 過誤를 淸算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天主께서 주시는 試鍊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 고난을 甘心으로 참아받고 또 이것을 사람들의 淨化와 聖化의 수단으로 알며 더욱 신앙심을 발휘하여…걾H(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자, 대구대교구장 최덕홍 주교 「모든 聖職者와 信者들에게」 중에서)
전쟁이 발발한 그해 5개월 동안 휴간했던 천주교회보 11월호에는 전쟁으로 입은 상처를 위로하는 한편 고통을 희생으로 알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글들이 실렸다. 희생된 성직자들의 명단과 함께 멸공, 반공을 외치는 글들도 게재됐다.
외국교회로부터 답지한 성금과 구호품 등에 대한 소식이 실리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전쟁 직후 외국 교회의 지원을 받아 구제사업을 활발하게 펼쳤고 이 원조금을 바탕으로 성당 건립과 사회사업, 교육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전재민 구호 활동은 교세 확장에도 기여해 50년대 신자 증가율이 무려 평균 16.5%에 달했다.
휴전 후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교회도 전쟁 이전에 조직됐던 각종 단체들이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9년 조직됐던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는 52년 활동을 재개, 55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확대 개편됐으며 59년에는 전국 교구장을 구성원으로 하는 사단법인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다. 당시 상당한 지식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이들의 개종기가 심심치 않게 실렸다. 예컨대 감리교 총이사였던 정춘수(1952년 11월1일자), 육당 최남선(1955년 12월25일자) 등 당시 지식인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상당한 화제거리였다.
교회 쇄신과 사회 정의 실현(1945~1981)
교계제도 설정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황 요한 23세 성하께서는 한국에 三대주교구(大主敎區)를 승격 발령함으로 전국 각 대목교구(代牧敎區)는 각 대주교구에 소속되는 자치의 완전한 교구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서울 대구 광주 등 三대주교구의 각 소속 교구를 결정하였다.(가톨릭시보 1962년 4월 1일자 1면 톱 中에서)
1962년 3월10일 한국교회에는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됐다. 「大主敎 三位 任命, 自治敎區 및 敎權上의 完全한 體制」라는 환희에 찬 제목으로 가톨릭시보에 보도된 교계제도 설정으로 한국 교회는 3관구 11개 교구로 구성되는, 명실상부한 세계 교회의 일원으로 올라섰다. 교황 요한 23세는 바로 그해 10월 11일 제 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막했다.
『…이번 공의회가 본질적으로 불변의 교리와 다른 어떤 신기한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대에 맞추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어 가면서 시대가 주는 위험에서 신자들을 보호하고 신앙생활을 완전히 하도록 하는 길을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 뿐이다』(가톨릭시보 1963년 9월 15일자 사설 「공의회를 정확히 인식하라」 中에서)
그후에도 가톨릭시보는 가장 정확하고 풍성하게 공의회의 진행을 중계했으며 공의회가 모두 마친 후에도 각 공의회 문헌들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해설했다. 공의회가 현대 교회에 준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다. 9개 교령과 3개 선언 등 16개 공식문헌을 남기고 1965년 1월 폐막한 공의회는 한국교회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교회 쇄신과 변혁
한국 교회는 공의회를 통해 전환기에 처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고 쇄신과 봉사의 자세를 다시 점검했다. 전례가 현대화됐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과 사회 문제에 능동적인 관심을 갖게 됐으며 개신교와의 일치운동, 타종교와의 대화에도 열린 자세로 임하게 됐다. 1965년 한국어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고 주일미사를 대신할 수 있는 토요특전미사가 71년 처음 시행됐고 이에 앞서 70년에는 인천교구에서 처음으로 평신도에게 성체 분배권을 부여했다. 가톨릭시보는 공의회에서 강조된 교회 일치에 대해 다른 무엇보다 큰 관심을 가졌다. 후에 추기경으로 서임된 김수환 사장 신부는 한 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내적 쇄신」과 「일치」는 공의회의 두 큰 「모티브」이다. 이것은 하나이신 아버지 천주님 안에 전 인류를 그리스도를 통한 형제적 사랑으로 모으는 교회 본래의 사명이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갈 길이 따로 있지 않다. 「저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하소서」.』
공의회를 거치면서 일기 시작한 일치의 기운은 성서 공동번역으로 구체화돼 1967년 4월 일치위원회는 개신교와 성서를 공동번역하기로 합의했고 1971년 신약성서, 1977년 구약성서 공동번역이 출판됐다. 이러한 열린 자세는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투쟁과 인권 옹호, 사회 개발을 위한 연대의 바탕이 됐다. 한국교회의 제도적 발전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된 것은 1966년 주교회의가 정식으로 조직되면서 부터다. 1968년 3월 8일에는 한국 최초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가톨릭시보 1969년 4월6일자는 추기경 탄생에 환호하는 한국 교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당시 김추기경은 일본에서 발표 소식을 들었으며 3월29일 김포공항으로 도착했다.
『새 추기경을 축하하기 위해 공항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노기남 대주교, 그의 노안에 기쁨이 가득했다.… 두개의 귀빈실은 꽉 찼고 광장엔 「환영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 탄생」이라고 쓰여진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한국 성직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토마(86세) 신부는 「오래 살고 볼 일이다」고 그 기쁨을 표시하기도.』
공의회의 영향은 평신도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인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68년 7월 대전에서 「한국 가톨릭 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가 발족한다. 주교회의는 이어 10월 「평신도의 날」을 제정해 12월 첫 행사를 거행했다.
사회 정의 실현
휴전 이후 50년대 연평균 16.5%라는 경이적인 신자 증가율을 보였던 한국교회는 60년대 접어들어 증가율이 연평균 6.2%로 급락했다. 70년대에는 5.2%로 더 떨어졌다. 이는 교회의 선교 정책에 일대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공의회가 사회 정의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새롭게 촉발했거니와 급격한 산업화와 독재의 압박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극단적 소외 속에서 교회는 사회 정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사회 참여가 곧 시대적 요청임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 첫 사건이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다. 이 사건은 JOC회원들이 중심이 된 노조를 업자와 경찰이 일방적으로 빨갱이로 몰아붙이면서 천주교 신자들은 고용하지 않겠다고 지역 업자들이 결의를 한 것에 교회 전체가 강력하게 대응한 것이다.
가톨릭시보는 계속 속보를 내보내면서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보호 위한 주교단 성명서」를 18일자에 게재했다. 14개 교구장이 서명한 성명서를 통해 주교단은 강화본당 신부와 신자들은 정당한 노동자들을 위한 모든 활동을 지지하면서 인간의 기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수호돼야 하며 기업주들의 부당한 억압이나 해고는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교회가 사회 현실에 들어간 첫 사건이었고 이후 교회 안에 노동 문제가 일반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같은 해 8월 JOC에서 농촌부가 분리돼 「가톨릭농촌청년회」가 설립돼 후일 가톨릭농민회로 발전했다. 1971년 11월 14일 제4회 평신도의 날을 맞아 한국 주교단은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같은 날 가톨릭시보는 성명서 전문을 1면 전체에 게재했다.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이 병행하지 않는 곳에서는 불안과 혼란이 따른다…교회는 세속과 타협할 수 없고 부정부패와 타협할 수 없다. 자신의 부정부패의 요소를 말끔히 청산하고 우리 사회를 혼란케 하는 온갖 부정부패를 일소하는데에 앞장서야 하겠다』 성명서는 교회의 사명, 한국의 현실, 공동선, 인간 존엄성에 대해 천명하고 정치와 기업, 상업, 농어민들의 처지 개선 등 시국 전반의 문제들을 망라해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인 강한 논조로 지적했다. 60년대말과 70년대의 한국 정치는 3선개헌과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 박정희대통령의 장기집권시도로 점철됐고 이 과정에서 독재에 반대하는 운동이 도처에서 발생했으며 정부는 정보정치와 인권 유린으로 대응했다. 성명서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이에 앞서 10월 원주에서는 지학순주교를 중심으로 「부정부패 추방운동」이 펼쳐졌고 1천여명의 신자들이 5일 밤 원동성당에서 특별미사를 봉헌하고 시위를 벌이려다 경찰 저지로 무산돼 성당 안에서 철야농성을 하기도 했다. (가톨릭시보 1971년 10월 10일자) 이듬해인 1972년 8월9일에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이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명령에 대한 교회 입장을 밝히는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김추기경은 여기서 비상사태 선포와 변칙 통과된 보위법의 철회를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시보에는 이 성명서의 전문이 실리지 못했다. 성명서가 실려야 할 1면에는 「예수 십자가에 처형되다」라는 제목으로 예수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한 후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의 비장한 성서 내용들이 실렸다. 이는 애당초 1면에 성명서를 게재한 신문을 당국이 모두 회수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신문사는 고심 끝에 예수의 죽음이 주는 상징성과 시대적 상황을 접목하는 방안으로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특집 기사로 게재했던 것이다.
1974년 8월 26일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되고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건은 교회의 정의 구현 활동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주교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혼란스러웠던 교회는 일치된 대응을 위해 9월26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탄생시켰다.
1976년에는 3월 1일 삼일절 명동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함세웅 신부를 비롯한 여러 명의 사제가 당국에 체포됐다. 1979년 오원춘사건은 안동교구 농민회원 오원춘씨가 5월 5일부터 21일까지 포항, 울릉도 등으로 연행된 사건이다. 안동교구는 경찰의 불법 연행에 항의하고 진상을 조사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러한 주장을 부인하고 사목국장 정호경 신부와 정재돈씨, 오원춘씨를 허위사실유포 및 국가안녕질서 문란을 이유로 구속했으며 이들에게 징역 2년에서 3년을 구형했다.
70년대를 뒤흔든 이러한 사건들에는 항상 가톨릭교회가 직접 간접으로 관련됐다. 민족과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투신한 교회의 사회 정의 구현 운동은 당연히 교세 증가에도 크게 기여했다. 60년대 침체 일로를 걷던 신자 증가세가 다시 높아져 1974년 12월 31일 현재 신자수 100만명을 돌파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집계 발표한 74년도 한국 천주교회 교세통계표에 의하면 전년도에 비해 5만 8천여명의 신자가 늘어나 6.2%의 신장률을 보여 총 101만 2209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체 인구 대비 복음화율 3.1%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