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침묵으로 시작된 80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에 이은 12.12사태, 그리고 80년 5월 광주…. 80년대는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국민 대다수가 그랬듯이 교회는 광주와 광주대교구의 참담한 비극에 예언자적 발언을 하지 못했다. 다만 모두가 회개하고 화해를 위해 기도하는 지혜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신문 80년 6월 1일자에는 광주 민중 항쟁과 관련해 5월 23일 긴급 소집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를 거쳐 발표된 특별기도 요청 서한을 보도했다.
"지난 5월 23일 광주사태와 관련, CCK 회의실에서 긴급 상임위원회를 개최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서한을 통해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같은 땅에서 같은 핏줄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인간적 충돌은 저지돼야 한다"고 천명, "감정적 흥분과 독선적 집념을 벗어버리고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자"고 촉구했다"(가톨릭신문 1980년 6월 1일자).
같은 날 신문에는 '광주 성직·수도자 전원 무사', '김재덕.김남수 주교 광주 방문 실패', '전주 사제단 광주 희생자 위로 미사', '전국 각 교구장 각 본당에 신자들 기도 당부 서한 보내', '서정길대주교 담화문 발표, 구호금품 모집 등 호소'등이 보도돼 행간에 숨은 긴박함을 엿보게 했다. 하지만 사건의 본질에 대한 평가나 정확한 사실 보도는 전혀 이뤄질 수 없었다.
대규모 종교 집회로 내외에 저력 과시
다음해인 1981년 10월 18일은 한국 천주교회의 저력을 내외에 과시한 날이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아 여의도에서 신앙대회를 열었고 '이 땅에 빛을'이라는 주제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이뤄진 일련의 사업들은 한국 교회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뤘다. 5월 3일 한국을 처음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6일 여의도광장에서 기념대회와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을 가짐으로써 교회 내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한국 가톨릭의 존재를 널리 알림으로써 전교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 복음화 제3세기를 연 역사의 현장 여의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 및 시성식이 거행된 여의도 광장은 100만 인파가 교황과 일치해 창출해낸 화해와 나눔과 증거의 대서사시였다. 인파! 인파! 인파! 한국 천주교회 200년 역사상 최초, 최대의 인파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운집한 곳이며 한국 순교복자 103위가 시성되고 한국 순교성인 103위가 탄생된 곳. 환호와 열광, 감격과 감동의 파노라마 속에 한국교회가 새롭게 태어난 땅, 여의도는 축복의 땅이며 영광의 땅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가톨릭신문 1984년 5월 13일자 中에서)
특히 200주년 기념 전국 사목회의는 1984년 5월 교황이 함께 자리한 가운데 개막, 1984년 11월 30일, 1981년부터 4년간 준비해온 12개 의안을 확정했다.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폭발적인 신자 증가율
대규모 종교 집회를 통해 한국 교회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됐고 이는 80년대 신자 증가율이 연평균 7.54%를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1930년 신자수 10만명을 넘어선 이래 1974년말 100만을 돌파했고 11년만인 1985년말 200만명으로 늘었다. 이러한 증가 추세로 7년 뒤인 1992년에는 다시 300만명을 넘어섰다.
이같은 성장은 당시의 사회 상황 자체가 지닌 요인에 크게 기인한다.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인간 소외 현상이 심화되고 인간 존엄성이 침해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에 대한 갈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나 다른 전통 종교의 교세 성장 속도에 비추어 높게 나타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시대적 상황을 읽고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민주화와 인간 존엄성 수호를 위한 투신이다.
시대의 고난을 민족과 함께
한국교회는 광주 항쟁을 야기한 정권의 폭압에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나름대로 항쟁에 대한 참여와 지원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1982년 3월 8일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은 교회와 정부가 긴장과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 사건이다.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수배자 문부식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부 당국이나 언론이 여론을 오도해 교회를 비방하더라도 신자들은 순교로 점철된 200년 교회사에 뿌리박은 우리의 신앙을 의연히 지켜가리라 믿는다'고 전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기도와 일치로써 꿋꿋하게 고난과 시련을 극복해 나갈 것'을 호소했다"(가톨릭신문 1982년 4월 25일자 中에서). 4월 11일자에서는 최기식 신부등 5명의 연행 소식을 전하면서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최창무 신부, 백민관 신부, 개신교 김상철 변호사 등의 견해를 통해 최신부의 행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고조되는 갈등과 긴장
80년대 중반 들어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정부와의 갈등이 본격화된다. 85년 김수환 추기경은 성탄 메시지를 통해 "민주화는 오늘의 문제에 대한 명백한 해답"이라고 천명하고 "화합을 위해 절대적으로 또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정치 지도자들의 회심"이라고 강조했다.
1986년에 접어들어 교회의 입장 표명은 더 명확해졌다. 정평위와 한국평협은 4월 9일과 10일 각각 성명을 발표,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번져가고 있는 KBS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에 합세했다. 각 교구 사제단과 수도회에서는 연이어 개헌 서명운동에 나섰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5월 6일 명동성당에서 시국 전반에 걸친 「민주화, 인간화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일에는 김대중씨가, 14일에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했다. 김추기경은 수시로 시국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86년 중반 이후 교회와 정부는 대단히 첨예한 긴장 관계에 놓여있었으며 곳곳에서 부딪혔다.
빛이 어둠을 이겼다 - 박종철 고문치사부터 6.29선언까지
87년 벽두부터 전국을 들끓게 한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은 온 국민들을 분노에 휩싸이게 했고 정권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어 4월 13일 정부는 모든 개헌 논의를 중단하는 「4? 호헌 조치」를 선언했다.
분노와 팽팽한 긴장이 일었다. 광주대교구 사제단에 이어 각 교구 사제단이 단식 농성에 들어갔고 전 국민으로 개헌 서명 운동이 확산됐다. 김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도 애석함을 토로했다. 87년 5월 18일 정평위가 주최한 '5.18 광주 항쟁 희생자 7주기 추모 미사'를 마친 후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김승훈 신부는 11개항으로 된 성명서를 통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했다. 정권의 존립 기반이 흔들렸고 범국민적 저항이 불붙었다.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고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 주최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18일에는 최루탄 추방대회, 26일에는 '국민평화대행진'이 개최됐다.
"전두환 대통령은 7월 1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시국수습 8개항' 제의와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이를 전폭적으로 수락한다고 천명했다. 특별담화에서 전대통령은 노대표가 제의한 직선제 개헌, 대통령선거법 개정, 사면 복권 및 구속자 대폭 석방, 기본인권 최대한 신장, 언론자유 보장 등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을 수락하고 임기 중 이를 적극 추진해나가겠다고 밝혔다"(가톨릭신문 1987년 7월 5일자 中에서).
결국 6월 29일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항복 선언을 했다. 빛이 어둠을 이겼다. 박종철군 고문 치사 폭로에서부터 호헌 철폐를 위한 각 교구 사제단의 단식 농성, 6월 항쟁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은 그대로 시대적 양심이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해
한국교회는 분단 이후 갈라진 북한 교회를 향한 통일 운동을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주교회의는 85년 북한선교위원회를 구성해 기도운동을 중심으로 북한 선교 문제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85년에는 분단 후 40년만에 북한땅에서 미사가 봉헌됐다. 남북한 고향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지학순 주교는 9월 22일 오전 7시20분경 감격적인 미사를 봉헌했다.
"분단 40년만에 종교가 말살된 북녘땅 공산 치하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미사성제가 봉헌됐다. … 지주교는 이날 미사에서 입당송과 대영광송 후 본기도문을 읽는 도중 순교자들의 희생 대목을 읽으면서 너무나 감격에 복받쳐 한동안 기도를 계속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울먹여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도 함께 울었다"(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中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88년 5월 15일 주일날 명동성당 구내, 이른바 '통일 열사' 조성만군의 할복에 대해 교회는 그의 결단을 고귀한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한 죽음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북한 교회의 활동도 이 해를 기점으로 재개됐다. 88년 6월 '조선 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됐고 교황청에서는 북한 신자 등을 바티칸에 초청했으며 평양에 장충성당이 준공됐다.
하지만 여전히 정권은 창구 단일화를 강조하며 북한과의 접촉을 봉쇄했다.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 의원이 방북으로 귀국 후 구속됐다. 살벌한 공안 정국 속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6월 6일 장충성당과 남한 임진각에서 동시에 통일 염원 미사를 거행했다. 임수경양이 평양에서 열린 세계 청년 학생 축전에 전대협을 대표해 참석했고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그와 함께 귀국하도록 문규현신부를 공식 파견했다. 물론 이 사건은 70년대에 이어 교회안에 새로운 파문을 던져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북한 선교 문제는 90년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자리잡았다.
질적 성장의 모색 1992년 한국교회의 전체 신자수는 300만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90년대 들면서 신자 증가율은 눈에 띄게 감소되기 시작했다. 82년 9.6%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래 80년대 지속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보이던 신자 증가 추세는 80년대 후반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해 90년 5.26%, 92년 4.9%, 94년 4.02%, 95년 3.36%, 97년 3.2%에 이르기까지 대폭 감소했다.
반면 냉담자 및 거주불명자는 91년 24.01%, 92년 24.73%, 94년 28%, 95년 27%, 97년 30%로 거의 신자수 3분의 1을 차지하면서 좀처럼 문제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90년대 한국 정치와 사회 상황이 어느정도 평온을 되찾음에 따라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고 교회 내적으로도 대규모 집회가 뜸해짐에 따라 전과 같은 '호황'을 누릴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중산층화, 여성화, 대형화 등에 대한 지적이 꾸준하게 제기돼 오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 대한 회의도 일었다.
이러한 추세를 보면서 교회는 양적 팽창에 걸맞는 질적 도약에 사목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90년대초는 이러한 위기 의식과 문제점의 인식을 바탕으로 질적 성장을 위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독재 정권에 대항한 민주화 투쟁의 성과가 가시화되고 또 어느 정도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교회는 생명운동, 환경운동, 여성 및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존중 등으로 관심사가 넓어졌다.
생명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92년 4월 8일 정부는 낙태를 사실상 합법화하는 형법 개정안 제135조를 입법 예고했다.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는 5월호 경향잡지에 낙태죄, 간통죄 폐지를 반대하는 주장을 발표했고 정평위는 5월22일 6개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최근 입법 예고된 형법 개정 시안 중 낙태죄와 간통죄의 폐지 조항은 인간의 기본 생명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성 도덕 및 윤리 도덕률을 심히 저해할 소지가 높은 만큼 반드시 철회되어야 한다. 낙태죄의 사문화는 정부가 낙태 금지법을 시행하려는 의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강력히 추진해온 반강제적 인구 억제 정책에 따라 고의적으로 방임한 때문이다"(가톨릭신문 1992년 5월 31일자 中에서).
한국평협도 6월21일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7월 13일 주교단이 '태아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운동을 시작해 105만9035명의 서명을 받아 형법 개정안 제135조 삭제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다. 반대운동은 94년에도 이어진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인간 생명」 반포 25주년을 맞은 93년 이래 한국교회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만연된 낙태 현실을 참회하고 바로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창조질서 보존을 위해
92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과 리우 환경회의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가 단지 남의 일이 아니며 한 나라 안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시켜주었다. 90년대초 교회 환경운동은 사회 전반적인 추세와 함께 생활실천운동을 중심으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됐으나 곧 후속 프로그램과 체계적인 추진이 미흡함에 따라 다소 침체된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94년 들어 서울과 대구대교구 등지에서 환경전담사제가 임명됐고 전국 환경사제모임을 통한 활동이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생활실천부가 환경보전부로 개칭하고 대구대교구 푸른평화운동본부가 지역 환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전국 환경사제모임은 93년 5월 창립돼 환경오염이 구체적으로 문제화된 지역을 순회하면서 모임을 정례화해 각 교구의 환경운동이 연대성을 갖고 추진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교회 환경운동이 여타 환경단체들과 갖는 연대가 두드러졌다.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과거 수십년간 구호의 대상이었던 한국교회는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위상이 변화했다. 주교회의가 93년 한해동안 해외원조를 위해 모금한 성금만 10억원이 넘었다. 「아프리카를 살리자」는 구호 아래 모금된 성금은 소말리아와 수단을 비롯해 가나, 니제르, 르완다, 케냐 등 기아와 내전으로 난민 구호가 절실한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 지원됐다.
내전으로 50만명 이상이 죽고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르완다 난민을 위해 한국교회는 94년 불과 석달만에 12억원의 성금을 모금했다. 이 모금운동은 8월초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가 전국협의회 총회에서 모금을 결정,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본보 역시 이 모금운동의 중심에서 적극 참여, 나누는 교회에 힘을 보탰다.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와 함께 해외원조에 대한 한국교회의 양대산맥으로 자리잡았다.
순교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어려운 시대일수록 선조들의 정신과 지혜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절실해진다. 순교성인들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과 기념은 90년대 교회의 위기의식 속에서 더욱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96년 9월 15일 성 김대건 신부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가 12만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청주교구와 원주교구는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을 기념해 시복시성운동을 추진하고 기념성당 건립에 착수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93년 한국가톨릭문화사연구회가 개최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이뤄졌다. 가톨릭신문은 '안중근 의거 정당성 인정' 제하의 1면 톱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안의사 추모미사를 주례한 김추기경은 강론에서 '안의사의 의거는 가톨릭신앙과 상치된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인정하고 '신앙심과 조국애는 분리될 수 없으며 일제의 무력 침략 앞에 민족의 존엄과 국권을 지키기 위해 행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와 의거로 보아야 한다'고 엄숙히 선언했다. 이번 추모미사는 제도교회를 대표하는 현직 교구장이 공식 집전한 첫번째 추모미사로 일제 치하의 한국 가톨릭교회가 범한 과오를 사과하고 바로잡은 것은 한국 현대 교회사의 일대 전환점으로 평가됐다"(가톨릭신문 1993년 8월 22일자 中에서).
화해와 일치, 북 동포 돕기 활발
1995년 3월1일 서울대교구내 민족화해위원회가 공식 기구로 발족하고 최창무 주교가 위원장에 임명됐다. 민족화해미사를 정례화하고 민족화해학교를 설치해 통일 시대를 대비하던 민화위는 10월30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주제로 역사적인 남북 신자 첫 통일 세미나를 뉴저지주 포트리시 힐튼호텔에서 개최했다. 이듬해에는 기아로 고통받는 북한동포들을 위한 국수나누기 운동이 광복절을 기해 시작됐다. 냉전시대의 적대감을 극복하고 한 핏줄로서 북한 동포들을 위한 이 모금에 한달 동안 무려 45억원의 성금을 약정받아 화해와 일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북한 동포를 우리 식탁에 초대, 한 그릇의 국수라도 함께 나누자는 사랑의 국수나누기 운동이 전교회적인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지난 8월 1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 사랑의 국수 나누기 운동은 현재 서울대교구내 각 본당 신자들은 물론 지방 교구와 해외동포 신자들의 참여가 쇄도하는 등 범교회적인 성격을 띤 돕기운동으로 파급되고 있다"(가톨릭신문 1996년 8월 18일자 中에서).
97년에는 다시 옥수수 보내기, 긴급 지원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사랑의 옷 보내기 등 다양한 북한 지원 방안이 지속적으로 마련됐다. 주교회의는 가을 정기총회에서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김수환 추기경을 위원장에 임명했다. 서울대교구는 통일사목위원회를 설치했다. 통일사목위원회는 98년 11월 3일 민화위와 통합됐다.
98년에는 북한 동포를 위해 교황님과 함께 하는 국제 단식의 날 행사를 4월에 가진데 이어 5월 15일에는 민화위 위원장 최창무주교 일행이 고위 성직자로서 최초의 사목방문 성격을 띤 북한 방문이 이뤄져 17일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 부족 현상은 이후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민화위 등 관련 기구들은 식량 지원을 계속 하는 한편 민족화해미사 등 기도운동을 통해 화해 일치의 기반을 다져나갈 계획이다.
교회 정보화 사업 본격화
정보화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교회 역시 행정 전산화를 중심으로 한 교회 정보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하지만 전산화, 정보화의 초기 투자비가 워낙 엄청난 탓에 각 교구별로는 이에 필요한 재원과 기술 인력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여건을 타개하고 세계 최초의 교구 전산망을 구축한 것이 서울대교구이다. 은행 및 일반 기업체와의 협력, 제휴 관계를 통해 문제점을 보완하고 마침내 98년 9월 20일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교구청과 교구내 본당, 산하 기관 단체들을 하나의 전용선으로 묶은 전산망을 구축하고 양업시스템을 개발했으며 제3의 선교매체 확보를 목표로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를 개통했다.
97년말 한국은 IMF 경제위기에 빠져 누구 할 것 없이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교회는 가차없이 진행되는 구조조정과 해고의 칼바람 속에서 신음하는 국민들과 함께하기 위해 쉼터, 봉급나누기, 무료급식, 구직알선, 결식아동돕기, 실직자가정결연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오면서 교회는 민주화의 현장에서 모든 국민들과 고통을 함께 나눴다. 교회는 또 한번 직장을 잃고 집을 잃은 이들과 아픔을 나누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실직자 대책은 교회 입장에서는 역부족인 감이 있다. 물론 교회가 만사의 해결사는 아니겠으나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의지로 경제 위기의 희생자들을 구제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94년 교서 '제삼천년기'를 통해 선포한 2천년 대희년의 정신을 사는 길이기도 하다. 교황은 교서를 통해 2000년을 은총의 대희년으로 선포하고 97년부터 99년까지 3년간을 대희년 준비 기간으로 삼아 성자, 성령, 성부의 해로 선언했다.
한국교회는 보편교회의 이같은 지향에 따라 95년 주교회의 가을총회에서 '2천년대희년주교특별위원회'를 설치해 대희년 준비를 전담하도록 했다. 주교특위는 98년 한국교회의 대희년 정신 실천을 위해 '새날 새삶'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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