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성지순례 의미
김대건·최양업 신부 활동 무대 중심
6월 2~9일 중국 유적지 보도 순례
현재 답사로 사적지 확인·코스 개발
한국교회사연 차기진 연구실장 동행
답사지 교회사적 의미 상세히 설명
가톨릭신문이 중국 보도성지 순례에 나선다. 6월 2일부터 9일까지 7박8일간에 걸쳐 중국 내 주요 성지나 유적지를 걸으면서 김대건·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우리 신앙선조들의 숨결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 지금까지 교통편을 이용한 중국 안의 한국천주교회 사적지 순례는 간간이 있어 왔지만 도보 순례는 처음이다.
이국 땅에서 선조들이 걸었던「신앙의 길」을 한발 한발 따라 걷는 감회는 어떨까? 잠시 150~200여년 전 역사 속으로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만 갖춰져 있다면 또다른 신앙체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있는 여행이기도 하다. 미처 상상할 수 없었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로지 조국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선조들. 그들의 숭고한 신심이 오늘의 나와 한국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씨앗이었다는 사실은 새삼 나의 신심과 한국교회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뜻깊은 피정도 될 것이다.
중국 도보성지 순례는 가톨릭신문 창간 72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다. 그만큼 신문사의 명예를 걸고 내실 있는 준비를 해왔다는 말읻가. 이미 97년 10월에 현지 답사를 마쳤다 교회사·여행사·신문사 관계자로 구성된 답사팀은 그동안 불분명했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사적지의 위치를 확인하고 적절한 도보 순례코스를 개발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이번 중국 도보성지 순례는 가톨릭신문이 지난 97년 창간 70주년을 전후해 매년 시행해오고 있는 전국 도보성지 순례의 연장선상에 있다. 96·97년「그 님의 발자취 따라」를 주제로 김대건·최양업 신부의 발자취를 중심으로 시행된 국내 순례를 마무리하면서 국외로 발길을 돌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순례 역시 중국 동북지역에 흩어져 있는 김대건·최양업 신부의 활동무대가 중심이 되고 있다.
98년 가족 도보성지 순례까지 3년에 걸쳐 6번의 전국 규모 도보성지 순례를 주관하면서 국내 성지순례의 새 장을 연 가톨릭신문사가 그동안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새롭게 도전하는 중국 도보성지 순례에는 답사를 다녀온 신문사와 여행사 관계자가 직접 안내한다. 또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차기진 박사가 동행하면서 답사지의 교회사적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게 됨으로써 보다 뜻깊은 순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교회사연구소 이사장 김수창 신부(서울 잠원동본당 주임)와 가톨릭신문사 사장 최홍길 신부도 함께 한다.
도보순례가 가능한 지역은 백가점 5㎞구간, 중국 변문에서 봉황산성까지 3㎞구간, 심양성당에서 고궁까지 1㎞구간, 훈춘성당에서 경원 경제 입구까지 10㎞구간, 소팔가자 진입로에서 성당까지 10㎞구간, 남당에서 북당까지 5㎞구간 등이며 백두산 등정도 포함된다. 노약자를 위해서는 차편도 준비해 놓았다.
■ 일정에 따른 사적지 안내
한국인 사제가 처음 선교활동 시작한 양관(陽關)에서 순례 공식일정 시작
백두산서「통일 염원 산상미사」봉헌
이승훈 세례받은 북당성당 등도 순례
순례일정
▶ 제1일 : 심양도착 양관으로 이동 공식일정 시작, 백가점, 챠쿠 순례
▶ 제2일 : 단동에서 압록강 우람, 단교 관광후 구련성·봉성 순례
▶ 제3일 : 심양 교구청·신학교 방문, 김패헌 주교와 미사, 요녕성 박물관 심양 고궁 등 관광
▶ 제4일 : 훈춘성당 방문, 도문에서 미사후 백두산으로 이동
▶ 제5일 : 백두산 등정, 백두산 미사 후 전지, 폭포, 온천 관광
▶ 제6일 : 소팔가자에서 미사후 장춘 시내 관광
▶ 제7일 : 북경 남당·북당성당까지 도보 순례, 북당 미사후 관광
▶ 제8일 : 자금성·천안문 관광 후 서울로 출발
첫날 심양에 도착한 순례단은 곧바로 양관(陽關)으로 이동해 공식일정을 시작하게 된다. 양관은 1843년 12월 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이 있었던 곳으로 당시 요동 지역 교회의 중심지였다.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가 그해 5월부터 12월 3일까지 즉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요동 땅에 머물면서 첫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 중심지를 백가점(百家店)과 함께 양관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 사제가 처음 선교활동을 시작한 중국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순례단은 양관에서 백가점과 챠쿠를 들렸다가 태장하(太莊河)에서 첫날 일정을 마치게 된다. 백가점과 챠쿠 그리고 태장하는 모두 요동반도의 남단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1842년 귀국을 위해 마카오를 출발한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조선선교사 메스트르(Maistre, 李)신부는 10월 23일 태장하 해안에 도착했고 사흘 뒤에는 백가점 교우촌에서 유숙하게 됐다.
그후 11월 3일 메스트로 신부는 최양업과 함께 요동반도 북쪽에 있는 양관 교우촌을 거쳐 소팔가자로 갔으며, 김대건은 1843년 2월말까지 백가점에 머물면서 조선 입국로를 탐색했다. 챠쿠는 백가점의 이웃에 있는 교우촌으로 1876년이래 조선 입국을 위해 프랑스 선교사들이 머물던 유서 깊은 곳이다.
둘째날 단동으로 이동한 순례단은 압록강과 구련성을 거쳐 봉성을 순례하고 심양에서 휴식하게 된다. 압록강변을 국경으로 하고 있는 단동은 중국 최대 국경 도시 중의 하나로 인구 70여만명 중 3000여명이 조선족이다. 김대건.최양업 신부는 의주 변문과 단동 인근의 구련성을 거쳐 중국 변문(책문)과 봉황을 지나 북경과 마카오로 갔으며, 압록강을 건너 1차 입국을 시도했다.
셋째날 일정은 심양에 있는 요녕성교구청 방문으로 시작된다. 신학교도 방문하고 김패헌 주교를 예방하며 미사도 봉헌할 예정이다. 요녕성 박물관과 심양고궁을 관광하고 연길로 이동한다. 심양은 봉천으로 불렸던 곳으로 김대건겷羚獰?신부의 유학로였으며 초기 한국교회 신자들이 북경을 들릴 때 이곳을 지나쳤다. 페레올 주교가 거주하던 곳이기도 하며 김대건 신부는 9번째 서한에서 심양의 역사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넷째날 훈춘으로 이동한 순례단은 훈춘성당을 방문하고 도문으로 옮겨 미사도 봉헌한다. 훈춘은 조선 동북쪽 입국로인 경원(慶源)으로 갈 수 있는 국경도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아 1844년 2월 5일부터 4월까지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고난의 여행을 한 뒤 그 여정을 '훈춘 여행기'에 남겼다. 그는 3월 8일 훈춘을 거쳐 경원으로 들어가 조선교회의 밀사를 만날 수 있었다. 1846년 초에 최양업 부제도 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로 탐색을 위해 훈춘으로 여행했으며 2월 중순 훈춘 인근에서 체포되었다가 이틀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1900년대 초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1924년에는 훈춘성당이 설립되었으나 훗날 침묵의 교회로 변했다.
다섯째날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등정하게 된다. 날씨 등 주변여건이 허락되면 민족통일을 염원한 산상미사를 봉헌한다. 밤 열차를 타고 장춘으로 이동한 순례단은 여섯째날 일정을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시작한다. 소팔가자는 장춘에서 서북쪽으로 약 75리 떨어진 사평(四平) 인근의 옛 교우촌이다. 김대건은 1843년 4월부터 1844년 말까지, 최양업은 1842년 11월부터 1846년 12월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신학공부를 계속하면서 조선 입국로를 탐색했다. 김대건겷羚獰汰?1844년 12월 10일경에는 소팔가자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다.
일곱째날 일정은 북경의 남당(南堂)성당과 북당(北堂)성당 순례와 미사로 시작된다. 만리장성 등 관광일정도 잡혀있다. 여덟째날에는 자금성과 천안문 등을 돌아보고 귀국길에 오른다. 명말청초 북경에 건립된 천주당으로 북당.남당.동당.서당 4개가 있다. 이중 현재 본래의 형태가 남아있는 유일한 성당은 1701년 건축에 들어가 1703년 12월에 축성한 북당 뿐이다.
남당과 동당은 조선 사신들이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서학을 접할 수 있는 장소였다. 1644년 소현세자가 예수회 샬 신부를, 1720년 이이명이 쾨글러 신부를, 1765년 홍대용이 할러스타인 신부를 각각 만난 곳이 모두 남당에서 였다. 1785년 초에는 프란치스코회 구베아 주교가 북경교구장에 임명되어 남당에 부임하면서 한국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는 1831년 조선교구 창설 때까지 지속됐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전교 근거지였던 북당은 한국천주교회의 창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1783년 이승훈이 북당을 방문했고 이듬해 세례를 받고 귀국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됐다. 1789년 한국 교회의 밀사 윤유일이 북당 선교 단장인 라자리스트회 로 신부를 만나 조건 세례를 받고 이듬해 귀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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