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깨우쳐 줘 고맙습니다"
97년 세밑, 갑작스럽게 사형이 집행된 23명의 사형수 중 한 명인 김용제(27)씨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남긴 말이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죄 값을 치를 준비가 돼 있던 그에게 사형은 가혹한 형벌이었다. 어머니의 가출에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시각장애로 취직도 안되던 김씨는 세상에 대한 증오로 91년 10월 훔친 차를 몰고 주말 여의도 광장에 놀러나온 인파를 향해 질주, 당시 6살 윤신재군을 비롯해 여러 명의 희생자를 냈다. 하지만 신재군의 할머니 서윤범씨는 오히려 관대한 처벌을 바란다는 탄원서를 내고 솜털 수의와 안경을 교도소로 넣어주었다.
"손자를 잃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金씨가 차마 세상에 대한 저주를 품고 이 세상을 떠나도록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듬해 6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참회한 김씨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세례를 받았고 사후 장기를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이후 새로 들어오는 재소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하면서 금요일 점심을 굶었다. 더 이상 그는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었다.
형 집행을 단행한 법무부 관계자는 당시 "장기 집행 사형수가 너무 많아 교도소의 수용 부담이 커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들었다. 문민정부 들어 세 번째, 지난 77년 28명을 집행한 이래 최대 규모의 '사법 살인'에 많은 사람들은 죄 유무에 상관없이 제도적 살인인 사형제도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사형폐지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2천년 대희년 앞두고 사형폐지운동 본격화
교회는 사형제도에 대해 안락사, 낙태 등과 함께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죽음의 문화'일 뿐만 아니라 범죄 예방 차원에서도 현실적이지 못한 것으로 지적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형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목적으로, 그에 앞서 2000년 한 해만이라도 집행을 중지하자는 운동을 전 세계적으로 펼치고 있다.
사형제도의 존폐를 둘러싼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국내에서 지난 48년 건국 이후 지금까지 사형 선고가 확정된 범죄자는 1000명을 넘는다. 이중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979명. 매년 평균 20여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89년 헌법재판소 창설 후 사형제도의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 소원이 여러 차례 있었다. 모두 합헌 결정이 내려졌지만 제도의 존폐 문제가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폐지운동이 확산됐다. 89년 종교 법조 언론계 인사들이 사형폐지운동협의회를 발족했고 92년에는 김추기경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8만 6509명의 서명을 받아 헌법재판소에 폐지 촉구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다시 불붙은 사형폐지운동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들을 제시하면서 더욱 힘있게 전개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지난 2월 상임위원회에서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5월 31일 세미나를 개최한다. 전국교정사목협의회가 다각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공동선협의회' 등을 포함한 여러 본당, 기관.단체들이 서명운동을 비롯한 다각적인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성 에지디오 운동본부를 중심으로 대희년 한 해 동안만이라도 형 집행을 정지하도록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국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훠꼴라레가 성 에지디오 운동본부와 연대해 동참하고 있다.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느님 뿐
사형제도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분명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에 합당하게 살 권리 즉 생명권을 갖고 있으며 이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느님이므로 인간과 국가가 이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교황은 98년도 성탄절 담화문, 99년 1월 발표한 아메리카 특별 주교대의원회의 후속 문헌에서도 안락사, 낙태, 사형제도 등 '죽음의 문화'에 대해 우려하고 사형제도의 폐지를 강력하게 촉구했다. 97년 9월 발표한 가톨릭교회교리서 최종 라틴어판에는 사형제도와 관련해 직접적으로 폐지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사형은 범한 죄에 대한 '속죄의 가능성을 단호하게 빼앗는 것'이라며 국가는 사형 집행 외의 각종 범죄 단속 방법을 갖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어 "이들 범죄자를 제거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도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매우 희박하다'"고 규정했다.
사형은 이처럼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반생명적인 제도일 뿐만 아니라 범죄 예방의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비효율적인 제도이다. 특히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오판의 가능성은 상존하게 마련이며 일단 사형이 집행되고 나면 오판을 수정할 어떤 가능성도 남겨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돌이켜볼 때 사형제도는 정권에 의해 악용되어 왔다.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해 과거 독재정권 치하에서 부당하게 사형이 선고된 이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역대 사형 집행자들 중 공안사범, 곧 국가보안법, 반공법, 비상조치령 등으로 집행된 사람이 살인이나 강도살인죄로 사형된 수보다 더 많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생명 존엄성에 대한 공감대
유엔 인권위원회는 4월 28일 사형제도 폐지와 이미 판결된 사형의 집행을 2000년 한 해 동안 유예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럽연합(EU)이 제안한 이 결의안이 통과됨으로써 올해 가을에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의 사형제도의 완전한 폐지와 기존의 사형 선고 유예에 대한 결의안 투표가 희망적으로 전망된다.
유엔의 이번 결의안 통과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대희년을 앞두고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 사형제도 폐지를 호소한 것과 때를 맞춰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 형성이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사형 폐지운동 펴는 국내 단체들
전국 교정사목협의회
교회에서의 사형폐지운동은 사실 그동안 선언적 차원에서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 정신에 입각해 사형의 부당성을 촉구해 왔지만 이렇다할 구체적인 노력은 보이지 못했다.
대희년을 맞으면서 실질적으로 사형수들을 구제하고 사형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노력들을 모색해왔다. 서울 사회교정사목위원회(위원장=김영우 신부)가 중심이 된 이런 노력들은 전국교정사목협의회 차원에서 올 한해 「사형제 폐지 및 대사면 운동」을 중점 사업으로 논의하게 됐다.
서울 사회교정사목협의회는 우선 외국의 사형폐지 노력들을 연구하고 세미나 등을 통해 여론과 정책을 유도해 나갈 방침이다. 타종교와의 연대를 통해 사형수를 무기수로 감하는 「최고수 감형운동」도 펼칠 계획이다. 범죄피해자 모임을 결성,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게함으로써 법정에서의 극형을 줄일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공동선협의회
인가의 사회적 활동에 있어 공동선을 증진한다는 목적으로 지난 3월 6일 창립된 공동선협의회(회장=김영배 국회의원)는 생명존중과 낙태반대 및 2천년 대희년 한 해 동안 사형집행 정지를 정부와 UN에 청원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연인원 500여명이 동원돼 지금까지 2만 5000여명의 서명을 받았으며 금년 내로 10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직 국회의원 등이 중심이 되고 있어 사형제도 폐지를 법제화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물론 UN 총회의결로 세계 각국에서도 사형제도와 낙태금지가 입법화 될 수 잇도록 하며 인류가 생명을 존중하는 기풍이 진작될 수 있도록 노력할 방침이다.
사형폐지운동협의회
교회 밖에서는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회장=이상혁 변호사·이하 사폐협)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1989년 2월 사형제도에 관한 위헌심판 청구를 제기하면서 같은 해 5월 30일 발족한 사페협은 과거의 오판 사례 등을 제시하고, 8번의 사형집행에 항의하면서 사형제 폐지를 위해 노력해왔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지난 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심판 결정에서 사형제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대명제를 수용하게 만든 것이다. 대명제를 수용하면서 현실적인 사회 문화 수준에 시추어 시기상조라는 결정으로 사형폐지의 달성은 안타깝게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사형제도에 대한 종전의 대법원 입장보다는 진일보한 결과를 도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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