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은 항구도시로 민심이 억세고 일정한 직업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결당을 지어 싸움을 일삼았으며 수부(水夫)들도 수천명이 되었는데 이들이 거리낌없이 온갖 나쁜짓을 저질렀다. 이러한 것이 천진교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1870년 일어난 천진교난은 중국 근대사상 비교적 규모가 큰 교난이었다. 1862년 북경 물리 주교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인애회(仁愛會) 수녀들로 하여금 천진에서 고아원을 하게 하였다. 서양선교사들이 구라파에서 모금한 돈으로 1864년 인자당(仁慈堂 고아원)을 건립하였는데 당시 수녀가 5명이었다고 한다.
옛날에 중국, 우리나라, 일본에 기아(棄兒)가 많았는데 특히 중국에 기아가 상당히 많았다. 그중에는 고아 사생아도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아가 더욱 많았고 흉년에는 기아가 더 많았다. 천진의 악속(惡俗)에 가난한 사람들이 아이를 키울 수 없으면 길에 버리거나 하중(河中)에 넣었다.
중국에 기아가 많아 천주교회가 중국에서 제일 첫번째로 자선사업을 한 것이 고아원이었으며 1867년 고아원이 전국에 100여개 되었다. 신부들이 외출하였다가 길에 영양실조 상태로 버려지거나 병들은 어린이를 데리고 들어오는 일이 흔히 있었다. 천진에 시약국을 설립하여 치료를 받기위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리 주교가 천진에 특수한 지방성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않은 것을 해소하기 위해 천진에 이런 자선사업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천주교에서 고아사업을 하는 것을 중국인들은 어린이를 유괴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서양선교사들이 어린아이의 안구를 빼고 심장을 도려내어 약품을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양장거(梁章鋸)의 저서 '낭적총담(浪跡叢談)' 중에 '서양인은 천주교를 설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입교하면 그 조상의 신위를 없애게 하고 주교는 백은 4냥을 준다.
병자에게 침자(針炙)하는데 부녀들로 하여금 나체로 치료를 받게한다. 또 사람이 죽으면 안구를 빼어 약으로 쓴다'고 적혀있으며 '고염부(顧炎武)'조차도 '포르투갈인들은 인육을 먹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원(魏源)'도 '선교사들이 안구를 빼어 먹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제가 종부성사를 줄 때 헝겊에 기름을 묻혀 임종자의 눈에 발라주었는데 이런 엉뚱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인자당에 고아가 많아 천진교난이 발생하기 바로 직전에는 고아가 45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인자당에 어린이를 다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양육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돈을 주었다. 이 일이 어린이 유괴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나쁜 사람들이 어린이를 유괴하여 인자당에 데려와서 자기가 양육하겠다고 하고 돈을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장씨 성을 가진 사람과 곽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어린이를 유괴하고 인자당에서 돈을 받아갔는데 관청에서 이 두 사람을 체포하여 사형시킨 일이었다.
천진교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천주교에서 아동을 살해하고 안구와 심장을 도려내어 약으로 쓴다는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천진의 성당에서 교우들에게 미혼약(迷魂藥)을 먹여 어린이를 유괴하도록 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었다. 이리하여 천진 주민들은 닭우는 소리에도 놀라고 호랑이 말만 들어도 얼굴색이 변할 정도였다.
1870년 초 여름 전염병이 돌아 20여일 만에 30∼40여명의 어린이가 사망하였다. 인자당 어린이 사망율이 높아 주민들이 의심을 하였는데 병들고 심한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들을 데려옴으로 사망율이 높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음력 5월경에 홍진이 돌면 온 마을을 휩쓸 정도로 굉장히 많은 어린이들이 사망하였었다).
망해루 근처에 묘지가 다 차서 하동(河東) 풀밭에 사망한 어린이를 매장하였다. 중국인들은 사자(死者)를 상당히 공경하였는데 풀밭에 어린이를 매장하였으므로 천진 주민들은 불만과 분노를 품었다. 어린이가 갑자기 많이 사망하였으므로 나무괴에 사망한 어린이를 2∼3명씩을 넣어 밤중에 풀밭에 매장하였다. 중국에는 야생개가 많은데 야생개들이 땅을 파고 시신 2∼3구를 끌어내었다. 시신이 부패하여 모발과 뼈만 남은 것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안구와 심장을 도려내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성당내 '지하실' 의심
중국에서는 사찰이나 민간신앙인 묘(廟)문을 항상 열어놓는데 비해 성당은 항상 문을 닫아놓으므로 중국인들은 그것도 의심을 하였으며 성당과 인자당에 지하실이 있었는데 옛날 중국과 한국 가옥은 지하실이 없었다. 중국인들은 서양 건축에 지하실을 보고 범죄를 위해 만든 것으로 크게 의심을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지 반교자들의 영향을 받아 천진에서 교난이 일어났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