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성 등주(登州)에서 선교사가 어린이를 살해한다는 반교서적 '벽사실록(闢邪實錄)'이 들어왔다. 천진교난을 선동한 사람은 진국서(陣國書)이다. 1870년 6월 21일 관원이 유괴범을 성당에 데리고 와서 사실 조사를 하였다. 주민 수천명이 창과 칼을 들고 성당에 와서 "서양인을 죽이자" 프랑스인을 먼저 죽이자" 구호를 외치며 몰려들자 프랑스 영사 퐁따니에르가 삼구통상 대신 숭후(崇厚)에게 왜 주민들을 진압시킬 군대를 보내지 않느냐고 하며 숭후에서 공포를 발사하였다. 군중들은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퐁따니에르를 죽이고 비서 시몽을 죽여 하중(河中)에 던졌다. 인자당에 방화하고 수녀 10명의 안구를 빼는 등 잔인하게 살해하였으며 이때 인자당 어린이들도 죽였다. 프랑스 신부 2명, 중국 신부 1명을 살해하고 영사관, 성당, 인자당에 방화하고, 영국교회를 파괴하고 외국인 20명을 살해했는데 그중에 프랑스인 13명, 러시아인 3명, 벨기에인 2명, 이탈리아인 1명, 아일랜드인 1명을 살해하였다.
수녀 10명 안구 빼기도
천지교난 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7개국은 청정부에 항의하고 각국의 군함을 천진 해구와 연대(烟臺) 일대에 운집시켰다. 직예 총동 증국번(曾國藩)을 보내어 천진사건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그의 보고서 중에 『교민과 평민간의 싸움이 있으면 평민은 항상 굴복하고 교민은 항상 승리합니다. 이 때문에 교민은 위세를 얻어 더욱 횡포해지고 평민의 원한은 더욱 깊어갑니다. 분노가 쌓이면 폭발하게 됩니다』라고 적혀 있다. 증국번은 어린이의 안구를 빼고 심장을 빼낸다는 말은 사실 무근한 일이라고 발표하였다. 연합국은 천진 지현과 진국서 등 3명을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천진을 초토화시키겠다고 위협 하였다. 교회에서 모두 배상을 요구하고 주모자 처벌을 요구하였는데 당시 북경 교구 델라쁘라체 주교만이 배상을 반대했다고 한다. 당시 백미(白眉)적인 존재라 아니할 수 없다.
청정부는 천진 지현을 흑룡강 부근으로 유배시키고 원흉을 처벌하지 않고 무명의 민중 20명을 사형시켰다. 배상금으로 프랑스 21만냥, 러시아 3만냥, 영국 2500냥, 미국 4785냥, 교우들에게 5천냥을 배상하기로 하였다. 천진교난은 서구 열강과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10년 동안의 교회 업적을 붕괴시켰다. 1861년 청암교난부터 1870년 천진교난 폭발까지는 반교회 투쟁의 초기 단계로서 그 특징은 지방 유지와 관리들이 투쟁에 참가하였다. 1870년 후 1890년까지 반교회 투쟁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 외국 침략에 반항하고 봉건적 압박에 반항하는 성질을 모두 가지게 되었으며 수많은 하층 군중이 더욱 광범위하게 참가하였다.
'봉건 압박'에 반항, 하층민 가세
복건성에서 반교운동이 빈번히 일어났는데 서양선교사들이 문을 나서면 군중들이 욕설을 퍼붓고 농촌에 가면 농부들이 호미와 도끼를 휘두르며 욕을 했다고 한다. 1871년 복청(福淸)에서 군중들이 모여 성당에 방화하였다. 건영(建寧)과 복주(福州)에서 연속으로 성당과 개신교 교회에 방화하고 선교사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주 근방에서는 마을에 공개적으로 "교인들에게 식료품 사는 것을 금한다"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1875년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연평(延平)에 교회를 건립하였는데 주민들이 두 차례에 걸쳐 파괴하고 선교사를 구축하였다. 개신교 선교사가 1879년 12월 서점을 개설하고 복음당을 건립하였는데 흥분한 민중들이 몰려오자 총으로 공포를 발포하였다. 민중들은 더 흥분하여 서점과 복음당을 파괴하였다.
사천성에서 반교투쟁 가장 치열
사천성에서 반교 투쟁이 제일 치열하였는데 교회에서 사천성에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 내강현(內江懸)의 교우 팽지순(彭志順)이 막강한 프랑스의 세력과 서양선교사 힘을 믿고 주민들을 마구 구타하고 횡포가 심하므로 주민들이 팽지순을 죽이고 그 여세로 성내 성당을 파괴하였다. 이러한 반기독교 운동은 1876년 인수(隣水), 배주 등지에 일어난 대규모 구교투쟁의 선구가 되었다. 검강현(黔江懸)은 원래 교우가 없는 지역이었다. 천동(川東) 주교가 이곳에 신부 2명을 파견하고 선교의 거점을 만들려고 했는데 주민들이 신부 2명을 살해하였다. 영산(營山)에서는 유생 7∼800명과 주민들이 합세하여 성당을 파괴하였다. 인수현에서 주민들이 성당 다섯 곳을 파괴하였으며 인수현의 반교 투쟁은 강북청(江北廳)과 배주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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