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차도 없고 기차도 없던 그 때, 한국 땅에서 이 곳 만주땅까지 고산준령을 넘어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을 생각하니 선교사들의 놀라운 열성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들어가는 말
나는 지난 3월 12일부터 22일까지 꼭 열흘동안 옛날 연길교구라고 불리우던 중국의 만주 동북 3성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참으로 은혜로운 여행이었다.
참으로 은혜로운 옛 연길교구 방문
만주 방문을 가지기까지 몇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약 5년 전에 여기 본당 총회장 직분을 맡으셨던 양대언(토마스) 회장이 지금 연길에 있는 과학기술대학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그 곳 성당의 사정에 대하여 지난 연말 우리 본당을 찾아와 신자들에게 말씀하여 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많은 신자들이 양회장의 말을 듣고 그 곳에 있는 조선족 성당(공소)을 도와주기로 마음을 가지게 되어 모금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회장은 좬지금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 사이에 신앙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그 사람들이 모일 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힘을 내면 만주 곳곳에 작은 공소 건물을 매입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약 500평의 땅과 부속 건물을 매입하는데 우리 돈으로 천만원만 가지면 가능합니다좭라고 말했는데 한달 안에 천만원 모금이 너무 쉽게 이루어졌다.
두 번째 일은 우리 본당 초창기 본당 총회장님으로 봉사하셨던 권대복(아오스딩) 회장이 성령봉사단 단원으로 봉사하던 중 뇌일혈로 갑자기 쓰러지셨는데 또한 갑자기 어느 날 치유의 은혜를 입으시고 건강을 회복하던 중 좥중국선교좦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조건 중국을 찾아 나섰는데 중국 우리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연길 지방에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 10년전의 일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조선족들을 만나고 새로운 믿음이 살아나고 있음을 감지하고 본격적으로 중국 선교를 위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약 4년전에 한겨레 복음선교단을 창립하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중국 조선족 뿐 아니라 중국 본토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중국 선교 열성인 양.권 회장님
권회장이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지금은 쓰지 않는 기도서와 성가책 등 많은 책자를 가지고 가서 전하여 주었으며 신부들이 사용하는 성작, 성합 그리고 종부 가방 등 여러 가지 성물을 전해 주었으며 지금까지 50여곳의 공소를 찾아가 성모상을 건립하여 주기도 했다.
양대언 회장도 바로 이 선교단의 일원으로 봉사하다 마침내 지금 연길에서 직장을 구한 것이다. 두분 회장이 나의 만주 방문을 위해 일정을 마련하여 주고 3월 중에 중국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제 그 일정에 따라서 동북 3성을 돌아본 이야기를 순서대로 정리하여 말하고자 한다.
▶첫째 날 (3월 12일, 금요일)
심양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은 오후 1시50분이었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먼저 주교님께 인사드리러 주교관을 찾아갔다. 물론 며칠 전에 이미 말씀은 드렸지만 본당의 여러 일들 때문에 늦게야 주교님을 찾아뵈었던 것이다. 9시가 조금 넘어 주교님께서 나오셨고 나의 일정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아주 반가워하시면서 잘 다녀오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다시 본당으로 돌아와서 10시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공항에 나갔다. 심양에서 오는 비행기가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두 시간 늦어진다고 한다. 약간 걱정을 하면서 기다렸다. 연길로 가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일찍 비행기가 도착하여 한 시간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공항에까지 나와서 환송하여 준 본당의 사목위원들에게 감사드린다. 중국 시간으로 오후 4시가 조금 지나서 심양 공항에 도착하였다. 같은 회사 비행기로 연길을 가게 되어 있었는데도 일단 짐을 찾아서 다시 연길행 비행기에 옮겨 실어야 했다.
5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좀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겨우 시간에 맞추어 비행기에 오르니 곧 출발하였다. 한 시간 정도 날아가더니 연길에 도착했다. 날씨는 꾸물꾸물하였고 6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양회장님 일행이 우리를 마중하기 위하여 열두명이 탈 수 있는 승합차를 가지고 나오셨다. 일단 우리 일행이 모두 작은 식당에 가서 저녁을 들었다. 우리 일행 8명이 함께 행동하는 줄 알았는데 경비가 많이 든다며 복자 수녀원 총장님과 두분 수녀님 그리고 나 네 사람은 대우 호텔에 숙박하기로 하였고 다른 일행 권회장님 부부와 선교단 회원 박한영(마티아) 부부는 따로 양회장님 숙소에서 지낸다고 해서 그대로 하시도록 말씀드렸다.
저녁 9시가 넘어서 호텔에 도착해 수녀님들과 나는 방을 얻어 들어갔고 다른 일행들은 다음 날 10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참으로 고맙게 연길까지 안내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 날 (3월 13일,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식당으로 내려와 보니 지난 밤에 눈이 왔나보다. 수녀님들이 수도복을 벗으시고 몹시 쑥스러워 하셨지만 이 나라 법이 그러니 할 수 없었다.
사복 입고 쑥스러워 하시는 수녀님들
중국 법에 따라야함으로 할 수 없어
9시 반쯤해서 승합차를 가지고 양회장님께서 권회장님과 박마티아 그리고 연길본당에서 일하고 있는 지철근(토마) 회장과 함께 오셨다. 두 부인들은 다른 일정으로 움직인다고 하였다. 저녁에 만나기로 하였다고 했다.
가난이 몸에 배인 신자들의 차림새
첫날 일정은 영암촌(英岩村)이라는 동네를 찾아간다고 한다. 영암촌은 만주에서 제일 먼저 미사가 봉헌된 장소라고 한다. 제일 먼저 성당이 세워진 곳이기도 한 것 같다. 용정시를 거쳐 약 한시간 걸려서 작은 마을에 도착하니 40여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이 그대로 몸에 배여 있는 차림의 오륙십대 노인들과 부인들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지토마 회장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1897년 한국에서 외국 신부님 한 분이 나오시어 여기에 첫 번째 선교의 자리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미루어 생각하여 보면 파리외방선교회의 어느 신부님께서 고산준령을 넘어 여기까지 오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 같다. 당시에는 차도 없었고 기차도 없었을텐데 어떻게 그 어려운 여행을 하실 수 있으셨을까. 선교사들의 놀라운 열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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