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부자 3인의 재산 합계가 가장 가난한 나라 48개국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것보다 많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지난해 8월 발표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부자 15인을 합치면 사하라 사막 이남의 중남 아프리카 전체 국가의 GDP를 넘는다. 84명 재산을 모으면 12억 인구를 가진 중국의 GDP보다 많다.
부자 나라 상위 20%가 전세계 재화의 86%를 소비하지만 하위 20%의 가난한 나라는 단 1.3%만을 소비할 뿐이다. 전세계 고기와 생선의 절반을 이들 나라가 먹어치우고 에너지와 전화, 자동차의 대부분을 이들 부자나라가 갖고 있다.
부의 편중은 빈곤과 기아를 낳는다. 1분에 34명(그중 24명은 어린이), 하루에 5만명, 1년에 1,800만명이 단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간다. 지난 5년 동안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이 150년 동안 전쟁과 혁명으로 죽은 사람보다 더 많다. 1억5천만명의 어린이가 학교가야 할 시간에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하고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1달러도 안되는 돈으로 하루를 산다.
더욱이 이 불평등 구조는 개선은 커녕 가면 갈수록 더 심화되고 있다. 하랄드 슈만 등은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에서, 무한 경쟁의 세계화 무대에서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가 부(富)를 '20 대 80'의 비율로 나눠 갖는 극단적 부익부 빈익빈의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상위 20%가 전체 소득 40% 점유
IMF 이후 일부층 소득 되레 늘어
한국은 어떤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최상위 20% 소득 계층이 국민 전체 소득에서 차지한 몫은 39.8%. 반면 최하위 20% 계층의 소득 점유율은 7.4%에 그쳤다. IMF로 돈 없는 사람들은 소득이 줄었지만 20%를 넘는 높은 금리로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소득이 늘어났다.
지난해 최하위 계층 20%의 월 평균 소득 감소율은 전체 평균인 9.9%보다 훨씬 많은 17.2%, 하지만 최상위 10% 계층의 월 평균 소득은 오히려 7.98%가 늘어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나 IMF까지도 한국의 불평등 구조가 매우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우려했다. 부의 편중 현상 자체도 문제이려니와 이른바 '가진 자'들의 오만과 허영은 계층간의 위화감과 갈등을 조장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동반자살에 이르는 동안 강남의 유흥가에는 '물 좋은'부유층 자제들이 북적이고 백화점에서는 고가의 수입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돈과 명예와 권세를 거머쥔 부자 사모님들의 '옷놀음'에 먹고 살기 힘든 서민들의 분노는 극을 향해 달리고 있다. '자본주의의 최대 수혜자'들은 "내 돈 내가 쓰는데 뭐가 문제냐"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아랑곳 없이 저 할 일을 할 뿐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1월 교황권고 '아메리카 교회'를 발표하고 소위 '신자유주의'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언론들은 이를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기실 자본주의 체제와 그 기본 철학인 자유주의(개인주의)에 대한 교회의 오랜 가르침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커다란 경제적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엄청난 부의 생산, 그 뒤안길에는 엄청난 빈곤이 쌓여가고 있었고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 구조가 자리하게 됐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사회주의의 발호를 불러왔고 교회 안에서는 남미를 중심으로 해방신학이 등장했다. 하지만 교회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갖는 반종교적,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비복음적인 요소를 분명하게 거부했다. 오늘날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귀결되고 이제 남은 것은 자본주의. 그러면 과연 가톨릭교회는 자본주의를 유일한 대안으로 보는가?
교회는 자본주의를 배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있는 그대로 바람직한 대안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교회는 사유재산권을 부인하지 않고 이윤 추구를 단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공동선의 원리에 합당해야 한다는 점을 항상 강조해왔다.
'노동하는 인간'(1981)은 사유재산권이 공동선에 대한 책임없이는 생각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재화가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공동 사용권에 예속된다"(14항)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제69항에서 극단적인 빈곤의 경우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서 필요한 것을 취득할 권리가 있다고 거듭 밝혔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의무를 지킴에 있어서 쓰고 남는 것만을 주어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깊어가는 불평등의 구조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조짐들은 존재한다.
극빈국 외채 탕감운동은 2천년 대희년을 앞두고 요원의 불길로 번져나가고 있다. 한국에도 대희년 특위를 중심으로 이미 11만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주교회의가 나서서 외채 탕감운동을 독려하고 그 상징적 조치로 가난한 본당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있다. 평신도들 사이에서는 대희년 운동의 일환으로 수입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따로 적립하는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IMF로 유례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나라도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수익을 나누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사랑의 봉급 나누기', '사랑의 쌀통'이 그 예이다.
앞서 인용된 UNDP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부자 225명이 단 4%의 재산만 내놓으면 전세계 수십억 가난한 사람들의 보건, 교육, 식생활 등 기본적인 생존 여건을 해결할 수 있다. 약간의 관심만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해낼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는 있다.
이제는 우리 모두에게 친교의 경제학, 나눔의 경제학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함께 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그러한 경제학의 이상(理想)을 본다. 비록 그 이상이 구현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지향에 따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려는 결단이 필요한 때이다. 특히 남보다 풍요한 삶을 누리는 이들에게 이는 더욱 그러하다.
UNDP 집계 ‘인간개발지수’ 상·하위 10개국
유엔개발계획(UNCP)이 지난해 8월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집계 발표한「인간개발지수」상하위 10개국.
■ 상위 10개국
1. 캐나다 2. 프랑스 3. 노르뒈이 4. 미국 5. 아일랜드 6. 핀란드 7. 네덜란드 8. 일본 9. 뉴질랜드 10. 스웨덴
■ 하위 10개국
1. 시에라리온 2. 니제르 3. 부르기나, 파소 4. 말리 5. 브론디 6. 에티오피아 7. 에니트레아 8. 기니아 9. 모잠비크 10. 잠비아
1891 ‘노동헌장’, 현대적 경제윤리의 효시
비오 11세 회칙 「40주년」발표
현 교황 「노동하는 인간」등 반포
가톨릭 교회가 보는 현대적인 의미의 경제윤리가 등장한 것은 교황 레오 13세(1878~1903)가 1891년에반포한 「노동헌장(Rerum Novarum)에서부터이다.
이 문헌은 자본주의의 비인간화에 도전하는 사회주의에 대해 무신론과 사유재산의 절대적 거부, 계급투쟁 등에 대해 부정하면서도 하느님은 만물을 모든 인간의 행복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신앙고백에 의거해 물질적 자원과 부를 적절하게 분배하고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헌의 의미는 실로 지대하다. 교회 안팎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를 계기로 교회에는 여러 회칙과 사도적 권고, 서한, 선언, 연설 등이 발표됐다.
비오 11세는 「노동 헌장」반포 40주년을 기념해 회칙 「40주년(Quadragesimo Anno, 1931)」을 반포해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 개인주의, 통제 불능의 경제적 지배, 절대적 자유경쟁이 그리스도교의 인간관과 세계관에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그후 요황 요한 23세는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 1961)」,「지상의 평화(Pacen in Terris, 1963)」등을 통해 앞선 교황들의 가르침을 현대적 경제 상황에 맞게 재천명했다.
이어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과 「80주년(Octogesimo Anno, 1971)」,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1981)」,「사회적 관심(Solicitudo Rei Socialis, 1987)」, 「100주년(Centesimus Annus, 1991)」등이 발표되면서 가톨릭의 경제 윤리 지침이 형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