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이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부귀영화 다 필요 없이 그저 북에 두고 온 처자와 누이 목소리라도 한 번 들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북에 두고 온 오빠 때문에 어머니는 50년 세월 동안 단 하루도 편하게 주무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제 연로하셔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만나기가 어려우면 편지라도, 그것도 안되면 다만 살아있는지만이라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1천만 이산가족들의 가슴 속에는 「죽기 전에 꼭 만나야 한다」는 일념 뿐이다. 지난 6월 3일 남과 북은 21일부터 쌍방 차관급 당국자 회의를 개최하고 특히 「이산 가족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49년간 단 한 차례의 고향 방문단 교류 외에는 어떠한 공식적인 상봉 자리가 없었던 이산가족들은 이번 만큼은 꼭 만남이 성사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
이산가족 교류 신청 몰려
차관급 회담 발표 이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시.군.구 협의회, 대한적십자사, 이북도민회 등 이산가족민원창구 270여개소에는 교류 신청에 나선 이산가족들로 붐벼 하루평균 70여명 이상이 접수하고 있다. 이는 지난 5월말 하루평균 2.7건에 비해 2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회담에서 합의가 이뤄지면 서울 시내 각 동사무소에도 민원창구가 설치된다.
남북 이산가족들의 상봉은 이제 한시가 급하다. 1세대 이산가족들의 나이가 이미 대부분 70세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의 경우 식량난으로 인해 고령의 이산가족 1세대 사망이 급격히 늘어났다. 특히 식량사정이 어려운 함경북도 지역에는 70살을 넘는 생존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세대들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이산가족 찾기는 큰 의미가 없다.
통계청이 추정한 집계에 따르면 현재 남한의 52세 이상 이산가족 1세대는 모두 123만명. 그중 60세 이상 고령자가 69만명이다. 나이별로 보면 ▲80세 이상 6만 3727명 ▲75~79세 7만 9830명 ▲70~74세 12만 1301명 ▲65~69세 17만 6702명 ▲60~64세 24만 8440명이다. 2세대와 3세대를 모두 포함하면 남한의 이산가족은 767만명 가량이다.
남북이산가족문제는 71년부터 계속 논의돼 온 것이지만 항상 복잡한 정치 논리에 파묻혀 아직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현안 문제로 남아왔다.
이산가족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한 당국자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앉은 것이 지난 71년. 대한적십자사의 제의로 그해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에서 회담을 열면서 처음 시도됐다. 그후 남북간에는 20여년 동안 본회담 10회를 포함해 예비회담, 실무접촉 등이 60여회나 개최됐다.
하지만 그 성과는 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단 한차례 뿐이었다. 91년과 92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부속 합의서 타결로 노부모 고향 방문단 상호교환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으나 이는 실천되지 못했다. 80년대 중반부터 표면적으로 재미동포들에 의해 북한 방문을 통한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뤄지긴 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남북한간의 이산가족 상봉은 아니었다. 남한 거주 이산가족들은 89년부터 상봉추진단체들의 주선에 의해 개별적으로 제3국을 통해 북쪽의 이산가족들과 생사확인, 서신교환, 상봉을 추진해왔다.
특히 북한 당국은 식량난이 극심해진 94년 이후 이산가족들이 드러내놓고 만나지만 않으면 이들의 상봉을 눈감아왔다. 이런 묵인된 만남은 97년에 접어들어 부쩍 늘어나 90년부터 96년까지 10건 안팎이던 상봉 건수가 무려 61회로 크게 증가했다.
90년부터 올해 5월말까지 이산가족 교류는 생사확인이 1546건, 서신교환 4784건, 제3국 상봉이 360건이다. 이산가족교류의 첫 걸음인 북한주민접촉신청은 지난해 총 3726건으로 매일 평균 10.2건이 접수됐으나 올들어서는 5월 30일까지 총 410건으로 1일 평균 2.7건으로 줄었다.
지난 83년 6월 30일 KBS TV를 통해 생중계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이산가족들의 가슴 아픈 사연과 분단의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내 전 국민을 울리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4개월 반 동안 접수된 신청건수가 10만 952건, 1만 189가족이 뜨거운 해후를 함으로써 갈라진 민족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후 15년 세월에도 여전히 변한 것 없이 혈육을 만나고자 하는 조그만 소망은 번번이 무산돼왔다.
소들도 가는 고향길 언제나…
핏줄에 대한 그리움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지난해 6월 500마리의 소떼가 북한을 향하던 임진각에는 실향민들이 나와 소들도 가는 고향길을 따라 나서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만나야 한다. 70, 80을 넘은 이산가족 1세대들이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온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이대로 묻힐 때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이어지는 한이 될 것이다. 이산가족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원만하게 합의가 이뤄져 올 가을 쯤에는 50년 동안 그리움으로만 쌓아온 가족들과의 상봉이 실현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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