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 하나 남김없이 되다 빼앗긴 일제 말기가 차라리 나았다” 한 탈북자의 증언은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어느 누구도 이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질타하고 있다.
탈북자, 몇년 전만 해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영웅 대접을 받던 이들. 그러나 요즘은 요란한 기자회견은 고사하고 신문 1단 기사로도 다뤄지지 않는 관심 밖의 존재. 이들을 난민으로 인정,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다.
탈북 러시가 우리에게는 일상의 일이 되고 있지만, 탈북자들에게는 여전히 칼날 위의 사투이다. 이 가운데 진정한 햇볕정책은 그 햇볕을 받기 위해 목숨까지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비춰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마저 일고 있다.
북한을 탈출, 국내에 입국한 탈북주민은 올해로 1000명에 육박한다. 89년 이전까지 모두 607명이던 탈북자는 90년대에 들어 매년 꾸준히 늘어 100년만의 대홍수라는 물난리가 난 95년을 기점으로 96년 56명, 97년 86명 등으로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기아를 피해 1300km에 이르는 압록강∼두만강의 국경선 일대로 탈출해 나오는 북한 주민들이 증가일로에 있으며 이들이 거의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최소 몇 천명에서 최대 몇 십만명으로 추정되는 탈북자 대부분이 불법체류자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현행 국제법상 전쟁과 박해 등 정치적 이유로 인해 외국으로 탈출한 사람만이 합법적 난민으로 보호나 원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 파괴와 정부의 자연재해 방지나 대처 능력 부족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 떠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한계 상황에서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이들을 「환경 난민」으로 규정해 이들도 국제법상 난민 처우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최근 탈북자를 두고 힘을 얻어가고 있다.
지난 84년 에티오피아 기근의 예에서 보았듯이 국제사회는 환경변화와 정치적 요소가 맞물린 「복합적 유민문제」의 피해자들에 대해 보호와 원조를 제공해오고 있다. 탈북자 문제도 예외일 수 없다. 비록 지난 몇 년간의 자연재해가 북한의 농업생산에 심각한 해를 입혔지만, 근본적으로 북한의 식량위기는 군사위주 중공업 우선정책, 중앙집중식 폐쇄 경제체제 등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탈북자들에 대한 난민지위 부여와 난민촌 건립이 국제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당국이 지난 95년 탈북자 수용소를 설치,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외교안보연구원에 따르면 중국정부가 지난 95년 중국 화룡에 식량창고를 개조한 수용소를 설치, 북한탈출 주민들을 수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수용소의 규모와 수용인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뒤늦게 이를 알게된 북한이 중국측에 강력히 항의하는 바람에 폐쇄되고 말았다. 유엔 난민 청원이 받아들여질 경우 중국 정부도 북한의 눈치를 보지 않고 탈북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탈북 난민들이 몰리고 있는 중국은 135개국이 가입한 「난민지위에 관한 협약(또는 의정서)」에 가입하고도 실질적인 난민심사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중국 정부가 탈북자를 '난민'으로 선언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4월말부터 북한선교위원회(위원장=이동호 아빠스)를 비롯한 종교계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북한 난민 보호 유엔 청원」서명운동은 탈북자 문제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줄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이 성과적으로 이뤄져 유엔의 문제제기를 통해 탈북자들이 중국 정부로부터 난민으로 인정될 경우 국제협약에 따른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떤 강제 송환도 할 수 없게 된다. 또 국제법에 따라 제3국도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등을 통해 이들의 보호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움직임은 해외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지난 3월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8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개신교인들이 이 모임에서 북한을 50번 이상 다녀온 한 전도사의 북한기아실태 설명을 듣고 운동을 구상하게 됐으며, 5월 23일 북미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지식인들이 워싱턴에서 모임을 갖고 북한을 탈출한 동포들에게 유엔이 난민 지위를 인정, 이들을 적극 보호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서명운동이 국제적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개신교측은 북한난민보호 유엔청원운동을 통해 이미 국내서만 10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고 있으며 미국 뉴욕과 LA를 비롯해 캐나다 등지로 파급시켜 나가고 있다. 천주교회도 뒤이어 이 운동에 동참, 각 본당을 중심으로 서명운동을 파급시켜 나가고 있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빌리 그레이엄(미국), 존 스토트(영국), 필립 텡(홍콩), T.아데이모(케냐) 목사 등 세계적인 개신교 지도자를 고문으로 하고 국내교계의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는 등 국제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어 우리 교회가 벌이고 있는 운동과 비교되고 있다.
개신교측의 이 운동은 또 중국에 거주하는 탈북자의 선교와 구제를 목적으로 현지에 미션홈을 마련해주는 「미션홈-1000교회운동」으로 확산되고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현재 100여명의 탈북자들이 중국 동북 3성의 27개 미션홈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국내 1000개 교회의 신청을 받아 접경지역 1만명의 탈북자들에게 미션홈을 마련해준다는 구체적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특히 미션홈에서 훈련받은 탈북자들이 대부분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미션홈운동이 북한의 복음화와 교회재건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개신교측의 전망은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일부에서는 UNHCR이나 중국 등이 탈북자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대량 탈북사태를 야기시킬 것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난민역사를 살펴볼 때, 전쟁이나 기아로 자국을 탈출한 사람들에게 국제법적 지위와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더 많은 난민이 발생한 사례는 없다.
또한 현재의 「북한난민보호 유엔청원운동」은 2천년 대희년을 앞두고 IMF라는 고통 속에서 더 큰 고통에 처한 한 형제를 망각해왔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새로 나게 하는 의미있는 몸짓이기 때문에 더욱 활발히 벌여 나갈 필요가 있다.
『숟가락 하나 남김없이 죄다 빼앗긴 일제 말기가 차라리 나았다』는 한 탈북자의 증언은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어느 누구도 이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엄중하게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