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순교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라고 부른 뒤 『2000년기말에 와서 교회는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교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2차례의 세계 전쟁, 나치, 공산주의, 무력혁명, 인종과 민족·종교간의 분쟁과 대학살, 민주화 과정에서 만난 독재 정권과의 투쟁들을 모두 포괄한다. 교황은 이어 지역교회들이 『순교하신 분들의 기억이 보존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권고했다.
한국에 있어서 「현대 순교자」들의 최우선적인 범주는 6·25를 전후로 한 민족 상잔의 희생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6월25일 야음을 틈탄 대대적인 침략 후 3년만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남북한은 엄청난 인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전 국토는 거의 황폐화됐다. 그 중에서도 공산체제의 가장 큰 장애로 여겨졌던 천주교회가 입은 피해는 더욱 컸다.
북한 땅이 침묵의 교회로 변모하는 과정은 곧 종교 말살 정책이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이 시기는 크게 해방과 함께 이뤄진 북한 공산군의 진주 시기로부터 6·25 이전까지, 6·25사변기, 그리고 이후 1950년대말 북한 공산 정권의 반종교 투쟁 운동기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북한 공산 정권의 종교 탄압
6·25 이전부터 이미 교회의 탄압은 이뤄졌다. 소련군, 중국 공산당, 북한 공산 정권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이미 연길과 북한에서는 교회측의 희생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23일 함흥교구 회령본당의 비트말 파렌코프(W. Farrenkopf, 朴偉明) 신부가 소련군에 납치돼 총살당한 것으로 시작된 박해는 1948년 9월 북한에 정식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본격화했다.
덕원면속구와 함흥교구의 경우 1949년 5월 9일 보니파시오 사우어(B. Sauer, 辛) 주교와 3명의 신부들이 체포된 후 6·25 직전까지 73명이 체포되거나 피살됐다. 박해는 평양교구와 황해도로 이어져 평양교구에서는 1949년 5월 14일 교구장 홍용호(洪龍浩) 주교가 납치된 이래 6·25직전까지 14명이 체포, 모두 행방불명됐다. 황해도에서도 5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행방불명됐다.
6·25사변 초기 순교자들
6·25 직전인 24일부터 27일까지 14명의 한국인 신부와 수녀들이 행방불명됐다. 이로 볼 때 북한 공산 정권은 전쟁 전까지 북한에 남아있던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색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군의 남침과 함께 탄압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6월 27일 춘천교구 소양리본당 콜리어(A. Collier, 高) 신부를 비롯해 여러 명의 춘천교구 신부들이 희생됐고 서울교구에서는 7월 11일을 전후해 교황사절 번(P. Byrne, 方) 주교를 비롯한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가 체포, 또는 피살됐다.
7월말부터는 충청도 서산, 전라도 목포 등에서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돼 행방불명됐고 서울에서도 여러명의 성직자들이 희생됐다. 이때까지 북한에 남아있던 몇몇 성직자와 수도자도 7월초부터 모두 체포되거나 피살됐다. 전선이 밀리면서는 투옥돼 있던 사람들을 살해했고 남은 사람들을 북송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행진
「죽음의 행진」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남한에서 끌려간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한 갈래였고 이미 함흥, 원산, 평양 교화소를 거쳐 1949년 8월 5일부터 「옥사독 수용소」에서 수용됐던 덕원·함흥교구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한 갈래였다.
서울 소공동에서 시작돼 평양, 만포, 고산과 초산,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 수용소」까지 이어진 비참한 행진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옥사하거나 학살된 성직자는 번 주교를 비롯해 7명, 수도자는 3명이었다. 북한 공산군은 10월부터는 각처의 한국인 성직자, 수도자를 살해하기 시작했다.
옥사독 수용소에 수감됐던 덕원, 함흥교구의 베네딕도 수도회원들은 10월 23일부터 만포를 향한 행진을 시작했다. 거기에서 관문리 수용소, 다시 옥사독 수용소로 이송됐다. 1949년에 체포됐던 베네딕도회원들 73명 중 31명이 죽음의 행진을 포함한 온갖 박해로 희생됐다.
현대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 및 확인된 명단
지금까지 6·25 당시 희생된 천주교인들에 대한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사나 북한 침묵의 교회에 대한 연구, 수도회나 황해도, 평양교구사 등 북한 교회에 대한 연구 등에서 이들에 대한 연구 성과가 나타나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지난 85년 발행한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6·25사변 중 희생된 성직자와 수도자, 신학생의 수를 모두 150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희생자는 교구장 5명, 신부 82명, 수사 25명, 수녀 34명, 신학생 4명이다.
또 지난 90년 주교회의 차원에서 대한적십자사에 생사확인을 요청한 북한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명단은 모두 118명으로 주교 3명, 신부 71명, 수사 13명, 수녀 27명, 신학생 4명이다. 지난해 교황청이 주교회의에서 요청, 수합한 '현대 순교자 목록'에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작업이 광범위하고 전문적인 연구 작업이 선행돼야 하는 대규모 작업임을 고려할 때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는 매우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파악된 순교자들 외에도 적지 않은 순교 사실이 숨어있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평신도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서울 명동성당 회장단 5명으로 이들은 후손들에 의해 비교적 순교 행적이 조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목록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곧 발간될 예정인 「북녘땅의 순교자들-평양교구편」은 처음으로 평양교구 순교자들에 대한 사료와 증언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엮은 것으로 성직자 16명과 수녀 2명, 평신도 8명 등 26명의 순교 과정을 상세하게 담아 후일 시복시성 운동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 당시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거나 피살된 이들은 대부분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과 교회를 지키려 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천주교 전래기의 순교성인들에 못지 않은 순교자적 삶을 살았던 「제2의 박해기」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현양하고 그 모범을 이어받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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