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와 명동성당
100여년 민족사 안에서 명동성당은 과연 어떠한 역할을 했으며 어떤 위치를 지녀왔는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그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인다.
6월 25일 열린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 「민족사와 명동성당」특별연구회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앙고백이자 증거의 마당인 「명동성당」이 새로운 천년기를 앞두고 민족사와 함께 걸어온 발자취를 학술적으로 고찰하는 자리였다.
명례방공동체 시절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9개 주제 속에 명동의 모습을 요약 소개한다.
■ 제1주제 : 서울의 신앙공동체와 명동주교좌본당 - 이영춘 신부(사제평생교육원 부원장·역사신학)
‘명동은 한국교회의 바티칸’
신유박해 이후 소강 국면에 접어든 교회는 가정 중심의 소공동체였기 때문에 가정을 통해 전파된 신앙이 2세대에 전파되면서 회복되어 나갔다. 그리고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면서 신도들의 조직을 정비하였고, 줄기차게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인 결과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가 설정됨으로써 세계 교회의 일원이 됐다.
이 역시 한명의 성직자도 없는 상태에서 이룩된 것인데, 이는 평신도에 의해 이룩된 조선 천주교회의 기적적인 탄생을 전체 교회 차원에서 인정한 획기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중국의 변방 속국처럼 여겨지고 있던 조선의 존재를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독립된 국가로 인정한 최초의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병인박해 이후 바뀌어진 국제 정치 상황 속에서 조선이 외국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천주교 역시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는 단계를 거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됐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발전한 한국 천주교회 모든 신자들의 의식 한 가운데에는 「서울의 신앙공동체」, 특히 이벽과 이승훈에 의해 시작된 「명례방 공동체」가 자리하고 있고, 이 공동체가 탄생한 지역에 조선대목구 주교좌본당이 설정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을 다시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례방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의 까따꼼바이고, 「명동본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바티칸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 제2주제 : 개항기 명동주교좌 본당과 신자들의 역할 - 장동하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한국근대사)
‘전국 교회 잇는 동맥 역할’
개항기에 설정된 명동 주교좌본당은 단순히 이름만 주교좌본당이 아니었다. 병인박해 이후 전국적으로 설립되는 모든 지역 본당의 모(母) 본당으로써 하나의 모델이었고, 모든 본당들의 중심이요 안내자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병인박해 이후 선교사들이 입국을 시작한 1876년 이후 천주교회는 박해 이전보다도 더 참혹한 상태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신자들은 서울 중심과 인근에 살면서, 조선 정국의 변화와 박해의 상황 등을 만주에서 재입국을 시도하는 조선대목구 제6대 교구장 리델 주교와 선교사들에게 전하면서 또 다시 성직자 영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성직자 영입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이 바로 서울 신자들이었다. 명동 주교좌본당의 신자들은 병인박해 이후 국내에서의 성직자 영입에 깊이 관여하고, 성직자들이 입국하였을 때에는 교회 재건에 중심적 인물로서 지방 공소와 신자들을 찾아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1878년 리델 주교의 체포·추방 이후 블랑 주교가 선택하였던 지방 공소 부흥 정책이 실행될 때 선교사와 선교사들 사이의 연락과 중국과의 연락 그리고 공소와 공소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따라서 개항기 명동 주교좌본당 신자들은 본당이 조선대목구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면, 그들은 전국의 교회 조직을 잇는 동맥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 제3주제 : 식민지시대 명동성당의 위치와 역할 - 윤선자(전남대학교 강사.한국근대사)
‘일제의 통제로 교세 둔화’
1882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설정된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며 총본산이다. 1911년 대구교구가 설정된 이후 서울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그 지역적 역할 범위는 축소됐지만, 한국교회의 대표 성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명동성당에서 전개되는 활동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으로 이해된다. 명동은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성당이라는 점에서 일제의 천주교회 구제 내용과 방법이 가장 먼저, 그리고 표본으로 시행되는 곳이었다.
명동성당은 학교 운영을 통하여 교육사업에도 참여했다. 1906년 명동성당의 주임인 포와넬 신부의 후원으로 최봉섭이 설립한 서당을 1909년 명동성당에서 인계받아 운영했다. 또한 1922년에는 지방 신자학생들을 위해 명동성당 경내에서 성가기숙사를 건축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성당으로 일제 식민지 시기에 명동성당은 언제나 일제의 감시와 규제 아래에 있었다. 1910년대의 부분적인 규제, 1920년대의 완화된 정책을 거쳐 1930년대 일제는 종교단체에도 전면적인 통제를 가했다. 일제의 전시총동원정책이 추진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전시총동원 체제로 개편하였다. 거의 모든 성당에서 일제의 강요 사항들이 실현됐는데, 명동성당에서는 일본군 상급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일제의 전시총동원정책들이 시행됐다. 명동성당에서 행해지는 종교행사에 일본국 상급자들이 참석했다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에 일본군들의 감시와 규제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 제4주제 : 해방공간의 명동성당과 서울교구(1945∼1950) - 강인철 교수(한신대학교.종교사회학)
‘해방과 함께 조직적 발전’
해방 후 서울교구가 남한 가톨릭 전체의 확고한 중심역으로 부상함에 따라 주교좌인 명동성당은 오늘날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와 유사한 역할을 부여받게 됐다. 우선 1930년대 이후 서울과 원산, 대구, 평양 등을 순회하며 열리던 주교회의는 해방 후부터는 명동성당의 주교관으로 회의 장소가 거의 고정되다시피 하였고, 이런 상황은 195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명동성당은 이 시기에 남한지역 교회를 위한 새 사제들을 탄생시키는 요람이기도 했다.
해방 후 교회의 상하 모두에서 순교신심운동 또한 상당히 활성화됐다. 무엇보다도 1946년은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1950년은 79위 복자 시복 25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이 때를 전후하여 순교신심운동이 크게 고조되었다. 아마도 가장 주목할 일은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일인 1946년 9월 16일에 한국 가톨릭 순교신심운동의 구심으로서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재발족되었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과 함께 명동성당은 지식인층의 입교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46년에 처음 시작된 「가톨릭교리강좌」가 대표적인 사례였는데, 강좌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1948년부터 춘계강좌와 추계강좌로 연 2회씩 개설됐다. 지식인들을 겨냥한 또다른 프로그램은 매년 사순시기에 6주간 계속된 「사순절 특별강론」이었다. 이 일련의 강의는 비록 명동성당의 행사이기는 했지만 범교구적인 관심과 참여 속에 진행됐다.
■ 제5주제 : 1950년대 한국 사회변동과 명동성당 - 노길명 교수(고려대학교.사회학)
‘민족의 수난 함께 한 명동’
1950년대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6?25와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였다. 교회에 대한 공산정권의 탄압은 3단계로 진행됐다. 제1단계는 성직자들에 대한 체포와 연행이었다. 제2단계는 교회시설의 강제점령과 수용이었다. 제3단계는 교회에 대한 회유와 이용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명동성당은 50년 8월 6일까지는 매 주일마다 미사가 봉헌됐으며, 본당신부의 사목활동 등도 계속됐다.
전쟁 직후 피난민과 이농자들에 대한 구제활동은 성당 복구와 함께 명동성당의 중요한 과제였다. 명동성당은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화 그리고 구원을 주는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전쟁 이전, 이승만과 친화적 관계를 유지해 오던 명동성당은 전쟁발발 직후부터 갈등관계로 급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의 도덕성 결여와 독재화 때문이었다. 당시 교회와 정치권력간의 갈등은 교회가 정교분리의 정신을 훼손하거나 정치를 이용하고자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닌 예언자적 사명의 수행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이후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명동성당의 사회적 위상과 발전은 한국의 사회변동이 가져다 준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동성당이 역사 전개의 한복판에 서서 민족이 겪는 수난과 고통에 적극 동참하고 그러한 수난과 고통으로부터 민중을 해방하기 위해 투신한 결과였다.
■ 제6주제 : 1960년대 명동성당의 존재 이유 - 조광 교수(고려대학교.조선후기사)
‘혼란 속 새로운 변화 잉태 ’
1960년대는 한국사회와 한국 천주교회 모두가 급격한 변화를 체험했던 시대였다. 당시 한국사회는 4?19 학생혁명과 민주당 정권의 등장, 5?16군사 쿠데타 및 민정이양이라는 정치적 사건들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또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한국사회는 급속히 산업화되어 갔다. 그리고 세계교회사적 차원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됐고, 교회의 쇄신이 도처에서 강력히 주창되던 때였다.
국내 정세는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등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 시기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되고 한국교회는 1962년 3월 10일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시행됐다. 1960년 당시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회 내지는 서울교구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명동성당은 한국에서 전개된 각종 정치 경제적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게 됐다. 서울교구내지 명동성당에서는 4?19 학생혁명에 대한 적극적 지지의 자세를 드러냈다. 그러나 서울교구 내지는 명동성당에서는 5.16 쿠데타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전혀 시도한 바가 없었다.
이 시기를 명동성당은 재적 성숙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 있었다.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이전부터 명동성당에서는 레지오 마리에나 교사회 등의 활동이 있었고 그밖의 신심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60년대 명동성당은 새로운 역사를 향한 준비작업을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던 데에서 그 존재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 제7주제 : 유신시대 명동성당에서의 민주화 운동 - 김녕 교수(서강대학교.정치학)
‘예언자적 역할에 충실’
1970년대 유신시기(1972∼1979)에 명동성당이 중심이 되어 교회와 국가간에 첨예한 갈등을 일으켰던 많은 사건들은 한국의 민주화운동 및 인권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고 그런 역할은 198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교회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을 불사하면서 복음 및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입각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했던 것이다.
또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두드러졌던 가톨릭교회의 사회참여는 한국의 민주화 뿐 아니라 교회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고(1965∼1975년 57.2% 증가, 1975∼1985년 89.6% 증가, 1985∼1993년 60.8% 증가), 교회의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빚어졌던 교회 내의 분열도, 성숙된 교회의 「일치」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여야 함을 교회로 하여금 터득하게 했다.
1987년의 「6·29선언」 이후 형식적이나마 민주화가 진전되어 각계 각층이 점차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됨에 따라 교회의 정치적 개입의 입지 내지는 역할이 줄어들게 된 것은 당연하며 바람직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 상황과 인권상황이 아직도 본 궤도에 제대로 오른 것이 아니라면, 도덕적 교사로서 그리고 예언자로서의 교회는 본연의 역할을 벌써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권의 추구와 정의의 요구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서도 여전히 중심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 한 가운데 다시금 명동성당이 있다.
■ 제8주제 : 1980년대 명동성당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 - 최종철 교수(부카레스트대학 한국학 파견)
‘민주화 성지로서의 명동’
명동성당은 1980년대 초반 광주항쟁 당시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기원하는 철야기도회의 장소였으며, 광주항쟁이 끝난 후에는 광주의 형제들을 위한 헌혈의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하여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었을 때는 가톨릭의 주요 성직자와 평신도가 한데 모여 정부의 부당한 조치를 항의하는 규탄의 장소이기도 했다.
1980년대의 명동성당은 한국교회사 속에서 왜곡되어왔던 복음과 역사의 관계를 광정(匡正)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니, 신앙의 선배였으면서도 합당한 가치평가와 존경을 받지못했던 안중근 의사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신앙을 재조명하는 미사를 갖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로써 명동성당은 민족사 속에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명동성당은 민주시민들의 공론의 장인 「아고라」(agora)를 갖지 못했던 1980년대 한국사회 속에서 아고라의 역할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맡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화와 정의가 외쳐지는 성당밖의 「명동성당」에 비해서 가톨릭공동체로서의 성당안의 「명동성당」은 얼마나 민주적이고 정의로왔었나를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21세기를 향한 명동성당의 비전은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의 다양하면서도 창발적인 참여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명동성당은 새로운 세기를 맞으며 1980년대의 경험에서 귀중한 경험을 도출해야 한다. 이제 명동성당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필요는 없어지고 있다. 이제 명동성당은 보다 근본적 차원의 「정신적 아고라」, 「문화적 아고라」 그리고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진정으로 복음화하는 「영성(spirituality)의 광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 제9주제 : 1990년대 한국 사회변동과 명동성당 - 추교윤 신부(청파동본당 주임.사회학)
‘새 100년 위한 계획 필요’
1990년대 들어 명동성당의 사회적 역할은 한국사회의 시민사회화를 위한 역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명동성당은 한국사회의 시민사회화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90년대 명동성당의 사회적 역할은 1970∼1980년대 민주화를 위한 역할처럼 직접적이고 주도적이지는 않지만, 한국사회 변동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순기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명동성당이 사회적 상징성을 가진다는 것은 명동성당이 담당했던 이같은 사회적 역할을 통해 사회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적 전망에서 볼 때, 이미 사회적으로 부여된 이 상징성을 앞으로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지는 명동성당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명동성당이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익 갈등을 조화롭게 조정하여, 사회를 정의의 바탕 위에서 통합하도록 하는 역할 속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명동성당은 한국 사회의 변동을 명확히 분석하고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성찰하여 이러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기반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는 사목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명동성당이 앞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명동성당은 이제 축성 100주년을 지나 새로운 100년을 위한 시작에 서서 한국사회가, 또 한국 천주교회가 명동성당에 요청하는 기대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폭넓은 사목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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