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계동의 한 할인매장. 문을 여는 9시30분까지는 아직도 한시간이나 남았지만 1층 정문 앞에는 벌써부터 인파로 장사진이다. 200여명은 족히 될 인파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아줌마」들이다. 세일을 시작하면서 선착순으로 컵라면 한 박스씩을 나눠준다는 광고 때문이다. 8층에 마련된 행사장에 먼저 닿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미어 터진다. 일부는 층계를 뛰어오른다.
한 젊은 아줌마. 두 아이와 함께 패스트푸드점을 찾아 한 보따리 먹거리를 들고 온다. 하지만 막상 돈 내고 먹는 것은 절반도 안된다. 항공사 회원 카드로 콜라는 공짜, 연초에 받은 서비스 상품권으로 애플파이 하나, 몇 번 먹은 회원 카드 적립으로 햄버거도 무료, 그래서 300원짜리 아이스크림 두 개 600원으로 한 상을 차렸다. 할인점과 백화점이 유난히 밀집한 노원구에서는 흔한 풍경들이다.
대체로 서민들이 모여 사는 상계동과 중계동 일대의 이들 대형 양판점들에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채소나 과일류의 값이 내려간다. 엄청난 인구의 짠순이 아줌마들이 십여개 이상되는 대형 수퍼마켓들의 상품 값을 줄줄이 꿰고 있기 때문이다. 단돈 10원이라도 싸게 파는 가게를 찾아 다니는 아줌마들의 억척에 부응하지 못하면 도무지 장사를 할 수가 없다.
수다로 중무장한 아줌마들의 입에 한 번 오르내리면 엄청난 자본을 쏟아 부은 대형 앙판점도 파리 날리기가 여반장(如反掌)이다. 얼마 전 오픈한 한 외국산 양판점은 개점 전부터 지역 주민들과의 마찰로 동네 아줌마들과 한 판 벌이더니 문을 연 후에도 넓은 매장이 휑하고 유치원 바로 옆, 주택가에 자리잡은 국내 굴지의 한 업체도 건물 관리비나 나올까 걱정될 정도로 한산하다.
아저씨들은 엄두를 못낼 일들을 우리의 「아줌마」들은 당당하게 하고 만다. 체면이나 남의 눈보다는 실익을 삶의 중심 가치관(?)으로 정립해 가정과 사회를 근검과 절약으로 이끄는 사람들이 우리네 아줌마들이다. 「아줌마」는 흔히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은 여자」를 일컫는다. 아직 할머니 소리를 듣지 않는 기혼 여성을 이 집단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어른인 여자를 친근하게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이 집단은 99년 현재 전체 인구의 20.4%(956만명)를 차지한다. 여자 중에서는 41.1%이고 물론 20대부터 50대까지에서도 미혼 여성이 있겠으나 20대에도 기혼 여성이 있으니까 전체적으로 한국에서 약 1천만명 정도가 아줌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줌마」라는 용어는 기혼 여성 집단을 매도하고 조롱하는 말로 자주 쓰여져 왔다.
아가씨들은 아줌마 패션에 대해 경멸한다. 뽀글뽀글 아줌마 퍼머, 얼룩덜룩한 웃옷에 「몸빼 바지」혹은 「고무줄 치마」에 목 언저리에 반짝거리는 가짜 장신구 따위가 그것이다. PC통신을 들여다보면 이런 조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줌마 하면 생각나는 것은? 시장 바구니, 떡칠 화장, 무릎에 걸린 스타킹. DJ. DOC은 아줌마를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나라 아줌마 세상에서 젤 빨라. 칼 루이스 벤존슨도 따라오다 지치죠. 옆에 생긴 빈 자리에 앉으려고 어디선가 느닷없이 번개처럼 날아와 그 큰 궁뎅이…두꺼운 얼굴 체면 양심 소용없다』
「아줌마 같다는 말은 아줌마한테도 결코 용납하기 어려운 천박, 무능, 무식, 몰염치, 촌스러움을 의미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아줌마는 일상적으로 존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부재한다. 한때 여성이었지만 이제는 여성성을 상실한 제3의 성이다. 기혼여성들은 아줌마이되 아줌마가 아닌 「미시족」이라는 호칭을 선호한다.
최근 들어 「아줌마」들은 엄연한 실존에도 불구하고 도외시되어온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11월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이라는 주부들의 모임이 창립됐다. 일명 「아나기」라 불리는 이 모임은 같은 제목의 책을 펴낸 주부 김용숙씨를 중심으로 창립 총회를 갖고 「아줌마 헌장」을 발표했다.
「아줌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수다와 무식, 몰염치, 이기주의의 대명사로 통하는 아줌마』라는 명칭을 극복하기 위해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가 났을 때 뛰어가서 앉지 않기 등 작은 예절 지키기 운동에서부터 시작해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임을 증명해보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서도 아줌마들의 입지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줌마를 위한, 아줌마에 의한, 아줌마의 인터넷 세상」을 표방한 「아줌마닷컴(www.azoomma.com)」을 비롯해 「주부닷컴(www.zubu.com)」, 「주부웹(www.jubuweb.com)」등 최근 들어 기혼 여성들을 타겟으로 한 사이트들은 40여개 이상을 넘어섰다. 아줌마닷컴은 지난 5월 회원들의 뜻을 모아 5월 31일을 「아줌마의 날」로 정해 지내기도 했다.
실제로 아줌마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의지를 주체적으로 관철하기 시작하면서 아줌마들의 저력과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이뤄지고 있다.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시민운동의 차원으로 들어서면서 아줌마들의 억척스러움과 집요함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1900년대 후반기 한국 아줌마상을 돌이켜보면서 아줌마들을 향한 조롱과 멸시가 얼마나 허황한가를 잘 알 수 있다.
떡장수 아줌마, 물지게 아줌마, 일수 아줌마, 주방 아줌마, 아모레 아줌마, 보험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어떤 역경이나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생명력과 뜨거운 가족 사랑이 깃들어 있다. 최근 들어 눈뜨기 시작한 조직적이고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자기 정체성의 인식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참여」가 이제는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섬에 따라 아줌마들의 지향은 이제 「나라의 기둥」으로 변화되고 『아줌마가 세상을 바꾼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아줌마들의 사회 참여와 조직적인 자기 자리 찾기는 자신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직접적인 동기는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이 조직화되고 집단적 움직임으로 나타날 때에는 결국 사회 참여의 형태가 되는 것이며 그 밑바탕에는 가정과 사회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깔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아줌마들은 가족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집단 운동으로 승화될 때 우리 사회의 저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아줌마들의 자각은 이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이들의 저력을 사회적 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때 그야말로 「아줌마 헌장」에서 밝히듯 산소 같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신(新) 아줌마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안의 아줌마들
교회안에서도 막강 ‘파워’
인적 구성·호라동성 등 모든 면에서 남성 능가
발전적 자아인식은 미흡
교회 안에서도 인식하든 못하든 아줌마들의 힘은 막강하다. 일단 신자구성비에서 남성 신자들을 압도한다.
현재 한국교회의 여성 신자 비율은 전체의 60% 가량으로 절반을 훨씬 넘는다. 지난 70년에는 56.5%였으나 80년 57.8%로 늘어난 후 90년에 이르러 60.3%로 늘었다. 99년 현재 여성 신자는 남성 신자에 비해 무려 70여만명이 많다.
인적 구성 면에서 뿐만 아니라 여성신자들의 교회 활동 참여는 능히 남성들을 능가한다. 기존 연구들을 통해 볼 때 여성 신자들, 특히 이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30대에서 50대까지 기혼여성들의 신앙생활과 교회활동 참여는 그야말로 한국교회의 손과 발을 이루고 있다.
기존의 연구들은 예외없이 미사 참례 빈도, 고백성사 빈도, 영성체 빈도면에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앞서 있음을 보여준다. 견진성사에서도 마찬가지로 93년 현재 남성신자의 77.8%가 겨진성사를 받은데 비해 여성은 83.4%가 견진성사를 받았다.
교회 활동에서도 여성이 남성을 크게 앞지른다. 70년에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단체 활동에 적극적이었으나 80년대에 넘어오면서 여성들이 남성을 압도한다.
최근 수년간 한국교회에서 그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 구역반 모임은 사실상 여성 신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93년 구역 반 모임에 매번 참석하는 남성은 전체의 20%를 밑돌고 절반 가까운 인원이 전혀 참석하지 않는 반면 여성들 절반 이상이 매번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처럼 한국 교회 안에서 여성 신자들의 역할과 활동 상황은 남성신자들에 비해 볼 때 압도적인 역동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을 위한 발전적인 자기 인식은 다소간 미흡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즉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 정신으로 온갖 교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적절한 자기 정체성의 인식이나 교회 의사 결정 과정에의 참여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것이다.
최혜정 수녀(성심수녀회·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는 최근에 나온 「신학전망」여름호에 기고한 「한국가톨릭여성들의 신앙 체험에 대한 신학적 고찰」에서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여성의 체험이 충분히 교회 공동체의 생명의 원동력이 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교회 여성들의 교회 안에서의 역할이 『관습적 개별 봉사에서 창의적 연대 봉사로 전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들어 일반 사회 안에서는 「아줌마」들의 자기 인식과 하나의 계층으로서 사회 참여를 위한 움직임들이 빈발해지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일부에서나마 이러한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즉 생의 어느 시기보다 자아 실현의 욕구가 강하고 통합적인 삶의 경험을 지닌 기혼 여성, 즉 아줌마들은 기존의 행동 대원으로서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자신의 신앙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주고해야 하다는 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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