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세계 제2차 대전을 통해 그 엄청난 비극을 보여준 핵은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의 하나로 남아 있다.
최근 몇 년 들어 깊은 우려를 자아내는 것은 생명과학 분야의 맹목적 탐구이다. 복제양 돌리를 시발로 생명의 인위적 조작을 기도하는 고삐풀린 탐구는 그 위험성에 대한 숱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과학과 종교를 이야기할 때 교회에 던져지는 가장 큰 돌은 이른바 좥갈릴레오 사건좦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고 나선 갈릴레오는 당시 교회에 의해 단죄되는 역사적 오점을 남기게 된다. 이로 인해 교회는 자연과학의 발달에 가장 핵심적인 기여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과학의 적(敵)으로 오해받게 됐다.
16세기와 17세기 과학 혁명 시대를 거치고 과학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이전에는 신의 영역으로 간주됐던 자연의 신비들이 속속 자연과학 지식을 통해 합리적 이성으로 설명해낼 수 있게 됐다. 신비의 영역을 파헤친다는 자만심에 사로잡힌 인류는 이제 과학이 종교와는 결별한 것으로 판단했고 공룡처럼 거대해진 과학 기술은 이제 결코 신앙이나 윤리, 하느님 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종교의 많은 부분을 대치하고 현대 문명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등장한 근대과학의 출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로부터 이뤄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 가톨릭교회는 과학의 발달에 절대적인 역할을 해왔음에도 몇 가지 역사적 과오 때문에 그 업적이 과소평가돼 왔다.
과학은 중세에 자연철학으로서 가톨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고 있었으며 기술 분야 또한 가톨릭에 의해 크게 지원됐다. 근대과학의 출현은 그 자체가 성서적 자연관의 승리에 바탕을 두었고 신의 작품에 대한 탐구의 결과가 그 내용을 이루었다.
중세의 과학기술은 가톨릭 신앙의 영향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13세기 옥스퍼드 대학의 프란치스꼬회 수사인 베이컨은 볼록렌즈의 확대 효과 등 광학 실험에 몰두했고 망원경, 잠수함, 비행기 등의 기계들이 나타날 것을 예견했다.
시계의 발명은 수도원에서 시작됐다. 해시계와 물시계에 이어 발명된 모래시계는 8세기 프랑스의 사르트르의 한 사제가 발명했다. 14세기 기계시계가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그 주역은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정확하게 이행하려는 수도회의 사제들이었다. 기록의 보전과 전달에서 교회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활자와 인쇄술 보급 전에 수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필사하는데 힘썼다. 구텐베르크의 현대식 인쇄술의 가장 큰 수요처는 수도원이었다.
과학과 종교의 전쟁(?)으로 오해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와 함께 데카르트와 파스칼도 가톨릭 신자였고 16세기부터 17세기초까지 수많은 과학단체들을 구성했던 멜센트 신부, 입자철학을 통해 근대과학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가쌍디 신부, 지질학 이론에서 18세기에 큰 영향을 미친 스테노 등이 있다. 멘델은 전문 과학자가 아니라 수도원의 울타리에서 연구하던 사제였다.
그러면 종교의 영역을 이미 오래 전에 대치한 듯 해보이는 과학과 종교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저물어가는 두번째 천년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다. 첨단 과학의 발전은 과학 기술에 대한 맹신을 확고하게 만들었고 좥과학적좦이라 하면 확실하고 정확한 것을 의미했다.
▲ 망원경으로 촬영한 은하계 모습. 과학과 신앙은 분명히 다른 두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두 영역의 유일한 근원은 하느님임을 교회는 강조한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절하게 수용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과학과 신앙의 이분법적 구분을 부정하고 과학과 신앙이라는 두 영역의 유일한 근원이 바로 하느님임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과학과 종교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야 한다. 편협한 합리주의를 넘어서 종교적 물음에 귀를 기울일 때 과학은 물질세계에만 갇혀있지 않을 것이며 종교가 그 원래적인 비과학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수용해야 한다.
그럴 때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핵전의 위협, 환경 파괴 문제, 생명 공학 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 훼손 등 숱한 도전들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