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흐르는 개울에서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의 모습엔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명력이 느껴진다. 지금껏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가두어 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자연에 풀어놓은 아이들은 어머니인 대자연의 품에서 스스로 배운다. 이름 모를 풀과 나무에 대한 지식부터 자연을 닮은 삶을 살아내는 지혜까지. 서울 무악동 선교본당 한누리공부방 초등학생 15여명은 충북 괴산 유기농 영농협동조합인 솔뫼농장으로 여름 생태캠프를 나왔다.
도시화에서 밀려난 이들이 수년의 철거투쟁으로 간신히 얻어낸 임대아파트 한 칸. 그래도 빠듯한 생활에 과외공부는 상상도 못하고 단란한 가족 피서 한번 가기 힘든 아이들. 빈민지역 공부방의 여름 캠프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꿈의 못자리다.
아주, 자주달개비, 개망초, 메꽃, 접시꽃, 질경이…. 철근과 콘크리트에 파묻혀 이름 한 번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들풀, 들꽃을 찾아 아이들은 '풀그림' 을 그린다.
아침 산책길에 발견한 개복숭아 나무에서 복숭아 한 알을 따서 쓱쓱 문지른 후 입에 넣으니 입안 가득 침이 괴여 온다. 오후에 농장에 나가 무공해 토마토, 호박, 수박을 수확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앗, 봉숭아다』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할머니집 마당의 빨간 봉숭아가 탐난 아이들. 할머니는 지금까지의 수고로움을 아까워하는 기색 없이 대뜸 몇 뿌리 뽑아주며 백반까지 쥐어준다.
든든하게 저녁을 먹은 뒤 촛불 밑에 줄지어 고사리손을 내맡기고 봉숭아물을 들인다. 티끌 하나 없을 것 같은 공기와 바람, 햇볕이 키워낸 봉숭아는 별빛까지 받아 유난히 새빨갛게 물이 들 것 같다.
농사꾼 정일우 신부
『이곳에 온 이후 아이들 눈망울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게 보이지 않아요? 역시 아이들은 자연의 맛을 볼 수 있어야 해요』 6년전 이곳에 터잡고 무농약으로 감자와 고구마밭을 일구고 있는 정일우 신부(예수회)의 말이다.
빈민운동의 아버지에서 땅과 생명을 살리는 농사꾼으로 새로 난 그에게선 이제 어엿한 농부의 태가 풍긴다. 아이들은 풀그림을 그리듯 마을 풍경을 새로 그린다. 전봇대와 전기줄은 지우고 시멘트 도로는 흙으로 덮어 다지고 슬레이트 지붕은 탐스런 박이 주렁주렁 달린 초가로 바꾸었다.
『서울에서는 예쁜 과일들만 봤는데 여기에는 신기하게 생긴 것들이 너무 많아 재미있어요』 『언제든지 개울로 달려가 물장난을 할 수 있는 게 제일 좋아요』 『밤에 한 귀신놀이랑 봉숭아물 들인 게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웃음소리에 솔뫼농장 근처의 폐교도 파란 하늘 아래 잠시 쓸쓸함을 내려놓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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