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단으로 3박 4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노범석(베드로.76.서울 구의동본당) 할아버지는 아직 상봉의 감동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북쪽 가족 얘기를 꺼내자 이내 상기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막내딸 얼굴이 눈에 밟혀 서울로 돌아오던 밤도 한숨도 못잤다』는 노할아버지의 눈동자는 잠시 허공 속에 머물렀다. 1.4 후퇴 때 사진을 한 장도 들고 나오지 못한 것이 그토록 큰 한이 될 줄 몰랐 다는 노할아버지는 이번 평양 방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막내딸 순복(52)씨가 수십년을 고이 간직해 오던 빛바랜 가족 사진 한장을 보물처럼 지니고 돌아왔다.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에서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가족을 이끌고 피란을 나섰지만 두, 세 살난 젖먹이 들을 업고선 한겨울의 삭풍을 견뎌낼 수 없었다. 고향 이백리 밖에 부인 조순옥(66)씨와 큰딸 순덕(54), 막내딸 순복씨를 피신시켜 놓고 두 달을 작정하고 나선 길이 50년 피끓는 한(恨)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떻게든 가족을 다시 볼 욕심으로 월남 후 경찰공무원직에 뛰어들어 배치된 곳이 강원도 춘천. 그러나 가족들의 생사는 알 수 없었고 그 사이 지금의 부인 방만하 (카타리나.69)씨를 만나 1남 5녀를 두었다. 가족에 대한 떨칠 수 없는 그리움은 급기야 지난 98년 6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고향땅이 바라다 보이는 중국 압록강 접경지역을 찾게 만들었다. 손에 닿을 듯한 고향을 앞에 두고 노할아버지는 압록강 다리를 반 넘어 건너다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살아있다니…. 꿈만 같았습니다』지난해 조선족 동포를 통해 큰딸이 고향땅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노할아버지는 딸이 보내온 사진을 가슴에 품고 무척이나 울었다. 평양행이 확정되자 노할아버지는 남대문시장 등을 다니며 북녘 가족에게 줄 선물을 고르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다. 그렇게 마련한 것이 카메라 두 대, 카세트 한 대, 옷가지, 금목걸이, 시계 10개…. 싸놓고 보니 노구가 감당해내기 힘든 보따리가 2개였다. 아내도 자신이 끼고 있던 반지를 얼굴도 본적 없는 북의 딸에게 전해달라며 손에 쥐어주었다. 한겨울 피란길을 떠올리며 두터운 가죽장갑 세 켤레와 양말도 잊지 않았다.
마음이 먼저 달려간 평양, 그러나 북녘땅에 큰딸은 없었다. 지난해 소식을 전해 놓고 죽었다는 사실에 할아버지는 주저앉고 말았다. 홀로 상봉장에 나온 막내딸이 먼저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죄 많은 아버지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 눈물과 함께 뱉어낸 아버지의 첫마디는 순식간에 반 백년 한과 설움을 녹여버렸다.
3박 4일간의 짧은 만남, 딸 순복씨는 내내 아버지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아버지, 통일되면 제가 아버지를 꼭 모시겠어요』딸의 한마디가 가슴 한 곳에 쿵하고 내려앉았다. 할아버지는 딸의 말이 서로에게 또 한이 될까 가슴에 담기 두려웠다. 눈물 그렁그렁한 딸과 담아낸 나흘간의 사진 속에는 50년 한보다 애틋한 그리움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통일, 경제적 정치적 논리를 떠나 사람을 먼저 생각 하면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겁니다』50년 시간의 간극을 단번에 뛰어넘고 온 노인의 통일론은 어떤 논리보다 힘있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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