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신부 - 선목촌 초대 주임으로 부임
임복만 신부 - 사제관에서 한글 교육 투옥
파리외방선교회 우신부 - 해북진본당 주임신부 선목촌에 자주 방문
중국인 왕신부 - 선목촌 보좌신부 역임
정준수씨 - 선목촌 건립한 독립운동가
김상교씨 - 선목촌 건립 또 다른 주역
이 글은 중국에서 사목중인 김영환 몬시뇰(대구대교구)이 지난 호(8월 29일자 13면)에 게재된 편지에 이어 보내온 글이다. 해북진에서 활약하던 한국인 신부와 평신도들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이 글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 사업에 열심히 동참한 선각자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울러 당시 조선인 교우들이 모여살던 「선목촌」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해북진 성당의 재건립 필요성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편집자주>
중국에서 사목하시다가 돌아가신 신부님들. 그들은 한국교회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있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시고 그 때 그 장소에서 같이 살던 몇 사람의 신자들 마음에만 남아있을 뿐 아무 기록도 없고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구 만주국 해륜현 해북진 선목촌(海倫縣 海北鎭 善牧村),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중국 흑룡강성 해륜시 해북진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는 1920년대 이미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님들이 사목하고 계셨다. 해륜, 해성, 해북 세 곳은 이름 그 자체가 천주교 이름이다. 해륜은 핼렌, 해성은 바다의 별, 해북은 요셉 성인의 이름을 딴 곳이다(중국에서 北은 남자를 상징하는 뜻이 있다). 특히 해북진은 근처 수많은 촌락을 관할한 읍 정도의 소도시다. 옛날 지도에도 해북진은 대성당으로 기입되어 있다. 그 당시 인구는 1만 2000명이었는데 8000명이 천주교 신자였다. 거기에 많은 조선 사람들이 살았다. 그 중 고해성사를 봐야할 조선인 신자만도 700명 가량 되었다. 그 이유는 일제 때 신자 정준수(스테파노·독립유공자)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중국으로 피신해 있던 중 선교활동으로 일생을 보낸 분이다. 그는 전라도·경상도지방 사람들이 일제에 의해 땅도 빼앗기고 쫓겨나서 생활이 곤란했던 시절, 독립보다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일제의 손이 미치지 못하리라고 생각되는 북만주 신자촌을 찾아 거기에 자리 잡고 큰 농장을 경영했다.
허허벌판에 동네를 세우고 한가족 한가족을 모아 촌락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선목촌」(善牧村)이란 곳이다. 중국이지만 거기는 중국 사람이 한 사람도 살지 않고 순수 한국 사람들만 살았다. 조선에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던 사람들, 혹은 농사 지을 땅도 없는 사람들, 또한 그들의 친인척들이 모인 곳이니 중국 사람들이 살 리가 없다. 농장경영이란 엄청난 일을 하다보니 일손도 모자라고 돈도 필요했다. 그 때 저의 가친 김상교(방지거)에게 일을 같이 하자는 제의가 왔었고, 아버지께서도 쾌히 승락하셨다. 그래서 1935년 우리 집안은 해북진으로 이사했다. 그 때 내 나이 5살이었다. 이사가서 1년이 될까말까 할 때 조선인 김선영 신부(서울교구)가 해북진 본당의 한 공소격이었던 선목촌에 부임하셔서 사목하셨다.
김신부님이 오시고, 중국인 왕신부님이 보좌로 오시어 한국말을 배우시면서 우리와 같이 살았다. 선목촌에는 조선인 어린이들만 다니는 소학교를 설립했고, 성당과 학교가 있는 선목촌은 여러 개 촌락들의 중심이 되었다. 주일만 되면 인근 9개 조선인 촌락에서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명실공히 조선인 본당으로 성장했다.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서 주교님까지 오셔서 견진성사를 집행한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몇 년 후 김선영 신부님은 주교 비서로 떠나시고, 임복만 신부님(전주교구)이 새로 부임하셨고, 점차 신자촌으로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러나 성당으로 학교 교실을 이용해서 미사를 집전하다보니 불편한 것이 많아 새 성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본당신자들이 노력동원도 하고, 쌀도 내고 해서 벽돌집 성당을 건립했다.
벽돌집이라니까 행여나 독자들께서는 한국의 어느 성당을 연상하실지 모르겠으나, 벽돌로 담을 쌓았으니 벽돌집이지 지붕도 볏짚으로 하고, 내부도 흙을 발라 흔히들 말하는 「하꼬방 형식」이라 비만 새지 않을 뿐 형편 없는 건물이다. 그러나 집은 형편없어도 신자들의 신심만큼은 지금 한국의 어느 성당보다 훌륭했다고 생각된다. 나는 거기서 첫영성체도 하고, 교리도 배우고, 나의 신앙의 바탕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옛날 시골의 어느 성당보다 건물은 낫지 않았으나 아이들의 신앙 교육은 매서울 정도로 철저했다. 지금 한국신자들의 몇 %가 천주십계, 4대교리, 4대 첨례, 성교 4규, 7죄종, 또 믿을 교리, 은총을 얻는 방법,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인지 순서대로 외우는지 묻고 싶다. 그 때 거기서 사목하시던 신부님들은 우리들에게 철저하게 교리공부를 시켰고, 거짓말은 못하게 가르치시고, 정직하고 남을 도우라고 가르치셨다.
선목촌에 학교가 있었고, 성당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과 어울릴 때가 많았다. 학교대항 체육대회가 해북진성당에서 열렸을 때는 거의 모든 인근 조선인 촌락에서 많은 신자들이 참석했다. 그 뿐 아니라 성체거동 등 성당 행사때에도 조선인, 중국인 할 것 없이 같이 참석했다. 그 때는 일제가 중국과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람과 조선사람들은 서로 의지하고 살았다. 이렇게 해북진성당은 조선인이나 중국인 누구에게나 정신적 지주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처럼 선목농장과 관련을 맺고 있던 해북진 성당이 파괴된 것은 1966년 문화혁명 시절. 당시 해북진 본당 우신부(파리외방선교회) 뿐만 아니라 선목촌 임복만 신부도 투옥되고 조선인 신자들은 대부분 귀국했다. 임복만 신부가 부임할 때부터는 일제 말기라 할 수 있다. 조선인 소학교에서 조선말을 못배우게 했고 창시개명이 시작되었다. 그 때 임신부는 사제관에서 한글을 따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고, 그 일 때문에 투옥되고 8.15 해방때까지 감옥살이를 했다. 해북진의 우신부도 불란서 사람이었지만 역시 같이 투옥되었다. 해방 후 신중국이 건립되고(1949년), 66년까지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불란서 신부들은 귀국했고, 조선 사람을 사목하고 있던 임신부님은 여러 형태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다 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교회는 탄압받았고, 임신부는 또 감옥에 가게 되었다. 정준수 회장도 투옥되었다가 길거리로 내몰렸고, 마지막에는 참변을 당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돌로 쳐죽이도록 하였고 나머지 가족들도 도망가 흩어지고 말았다. 임신부는 여러 해 옥살이를 하다가 쫓겨나서 숨어살면서 교우들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있던 중 문화혁명이 끝나자 본교구인 전주에서 투병중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천신만고 끝에 가족과 귀국해서 1972년에 돌아가셨다. 해방 후 귀국하기 직전 어머니는 중국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때 막내 여동생도 어머니와 같이 죽었다. 그런 중국에 무슨 미련이 있느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해준다면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금 대구평화방송 최영수 신부는 죽은 막내 동생과 동갑이다. 최영수 신부와는 아래윗집으로 서로 친했고,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잘 지내고 살았다.
부산교구 김성도 모이세 신부(은퇴)는 안중근 의사 집안이다. 어머니가 안중근 의사의 친척이다. 일제 때 조선에서 살기 힘들어 러시아까지 도망가며 많은 고생끝에 선목촌이라는 데까지 와서 살았다. 정준수 회장(독립유공자)은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에 도망와서 일행과 떨어져서 전교사업을 하려고 물색하던 중 파리외방선교사들이 산다는 해북진까지 와서 정착하게 되었고, 조선인을 위한 농장을 설립하고 일제강압에 못이겨 땅도 빼앗기고, 농사를 짓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일생을 하느님 사업으로 보내다, 결국은 비참히 돌아가셨다. 아버지 역시 그 일을 하다가 청춘을 다 보내셨다. 하지만 선목촌의 성당도 없어지고 학교도 없어지고, 해북진성당도 파괴되고 말았다. 해북진성당은 인민정부에서 사용하고 있다한다.
우연한 기회에 해북진을 방문하게 되었고, 옛날 살던 집이라도 보고 싶기도 해서 방문한 기회에 해북진장도, 해륜시장도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모든 혜택은 다 줄 터이니 꼭 옛날같은 성당을 지어 달라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라는 것은 지금 부산에 살고 있는 박경수 요한이란 분이 중국에 관심을 갖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벌써 성당도 여러 개 지어준 분이다. 내가 옛날에 해북진에 살았다는 것을 알고, 같이 가자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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