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야 할 시간인가? 기약없는 이별을 앞둔 혈육들은 눈물을 삼키며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다. 서울과 평양의 짧았던 3박4일. 이별의 마지막 아침에는 하늘도 7천만 겨레도 함께 울었다. 온 겨레를 떠들썩하게 했던 감동과 환희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이렇게 역사의 한페이지로 저물고 있었다.
8월 18일 오전 7시,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 이곳은 석별의 정을 아쉬워하는 남측 이산가족들과 취재진으로 초만원을 이뤘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보려나. 아흔의 한 노모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칠순 아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이곳을 찾았다.
이러한 통곡과 눈물의 현장에 정춘희(마리 헬레나 .60)씨도 함께 했다. 다시 북으로 가야하는 오빠 정창모(68)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춘희씨는 오빠를 기다리는 동안 내내 울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을 했다. 하지만 이내 북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연신 눈물을 훔쳤다. 더욱이 그렇게 애타게 아들을 그리워하다 한많은 생을 마감한 부모님 생각에 더 가슴이 찢어졌다. 어머니의 삶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애절했다. 그토록 오매불망 아들을 잊지 못해 가슴 졸이다 한맺힌 생을 마감한 어머니 이업동씨. 춘희씨는 어머니 생각에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는 오빠가 떠나간 뒤 눈을 감을 때까지 오빠 생각에 가슴 아파했어요. 아마 하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시며 함께 기뻐하실 겁니다』 춘희씨가 처음 오빠의 생존 소식을 접한 것은 13년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당시 LA 한인신문에 실린 기사로 춘희씨와 가족들은 오빠가 살아있음을 알게 됐다. 창모씨는 화가였다. 평양미술대학을 나온 그는 공훈예술가를 거쳐 89년 인민예술가 반열에 오른 북한의 대표적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이 기사를 보고 우리 가족들은 너무나 기뻐 만세를 외쳤어요. 죽은줄만 알았던 오빠가 살아있다니 정말 꿈만같았습니다』 단란했던 가정은 창모씨가 6.25 전쟁 당시 전주북중 5학년(19세) 때 의용군에 입대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부모님은 크나큰 심적 고통으로 하루 하루를 싸워나가야 했다. 정말 사는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춘희씨에게 오빠는 원망이 아닌 애틋함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지난 57년 전주 성심여고 3학년 때 그는 교지에 헤어진 오빠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소설 「소녀」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오빠와의 만남이 가상으로 꾸며져 있다.
『아아!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오빠가 이제 눈앞에 있는데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중략. 미선이는 가슴에 십자가를 그으며 성모 마리아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마리아! 당신은 저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모은 당신의 손을 좇아, 저도 당신을 우러러 봅니다. 마리아! 오늘이 있게 해주신 당신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57년 춘희씨가 발표했던 「소녀」 중에서)
그렇다. 43년만에 소설속의 「기적 같은 만남」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다. 춘희씨는 오빠에 대한 이 애절함이 하늘에 닿아 주님께서 배려해주신 은총 이라 믿고 있다. 첫 상봉이 있던 15일. 이날 오빠를 위해 감사 미사를 드린 춘희씨는 떨리는 마음으로 상봉장소에 들어섰다. 그리고 드디어 50년간 애타게 그리워하던 오빠 창모씨를 만났다.
『춘희야, 남희야. 이게 얼마만이냐』『오빠, 오빠…』이들은 만나자마자 눈시울을 붉히며 제정신을 잃은 듯 서로를 외쳐댔다. 기나긴 이산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감싸안고 비벼대며 혈육의 뜨거운 정을 나눴다. 이 순간만은 50년전으로 되돌아가 어렸을 적 여동생 춘희와 오빠 창모였던 것이다. 단체상봉과 개별상봉 등 모두 여섯차례의 만남. 창모씨는 누이들에게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그동안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니』 란 말을 수차례 되풀이했다. 그동안 부모님과 형제들에 대한 미안함에 가슴이 미어 졌다며 울먹이는 오빠를 보며 춘희씨도 함께 울었다. 특히 죄많은 자식으로서의 심경을 녹음기에 담아 춘희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창모씨는 이번에 가족들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한가지씩 했다. 자신의 정성과 사랑이 듬뿍 담긴 그림이 그것. 본인의 심경을 담은 글과 함께 펼쳐진 동양화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져 있었다. 꿈같은 상봉의 날들이 야속하게 흘러갔다. 춘희씨는 상봉의 마지막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밤새 울었다. 드디어 이별의 시간.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헤어져야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창모씨는 울먹이는 동생들에게 『건강하게 잘 살면 다시 만날테니 울지말라』고 다독거렸다. 춘희씨는 오빠와 다시 이별해야한다는 현실이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그래도 저는 오빠를 볼 수 있었으니 행복한 사람이겠죠. 아직도 수많은 이산 가족들이 혈육에 대한 그리움에 한맺힌 세월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하루빨리 이러한 이산가족들의 간절한 염원이 이뤄질 수 있길 하느님께 매일 기도드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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