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매년 9월을 순교자성월로 정해 한국교회의 오늘을 있게 한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그 삶과 신앙을 이어받기를 권고하고 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2000년 한국 교회의 순교 신심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지난 1984년 시성된 103위 순교 성인들에 대한 현양과 그 신앙.삶을 이어받고자 하는 순교 신심의 정착이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는 가운데 한국교회는 내년 신유박해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제2의 시복시성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연 순교 신심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성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반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은 제2시복시성운동의 참 의미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고 있다. 순교자성월을 맞아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가 참된 순교자의 신심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색한다.
한국 순교성인 103위가 탄생한 것이 지난 1984년.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교회의 순교 신심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우선 일반 신자들의 순교자들에 대한 인식이 시성 당시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성식이 거행된 1984년 이후 새로 영세를 한 신자수가 전체 신자수의 절반이 넘은 195만여명에 달해 한국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교구와 본당 차원에서의 철저한 재교육이 절실한 상황이다. 순교자들에 대한 인식 부족은 각종 순교자 현양 사업이나 기념행사들에서 참여도의 부족으로 나타나고 순교 신심이 일반 신자 대중의 삶 속에서 뿌리내리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그 대안의 모색이 절실하다. 실제로 순교자에 대한 인식 부족은 한때 붐을 이뤘던 한국 순교 성인 본명 갖기 운동이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서도 나타난다. 시성식 당시만 해도 새로 영세하는 신자들 중에 많은 수가 한국 성인의 이름을 본명으로 택했 지만 지금은 극소수에 그치고 있다.
본당 주보로 한국 성인을 모시는 경우도 줄어들었다. 예컨대 서울대교구의 경우 한국 천주교주소록에 나타나 있는 주보성인을 보면 시성식이 있었던 1984년 이후 설립된 88곳 중에서 한국 성인을 주보로 모신 곳은 20개가 채 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자들이 순교자에 대해 가장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자신의 본명을 한국 성인으로 정하거나 본당 주보 성인으로 모시는 것임을 생각할 때 일선 사목자들의 보다 깊은 관심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순교자들에 대한 일반 신자들의 관심을 불러올 수 있는 자료집과 전기, 각종 시청각 자료들의 개발도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순교성인들에 대해 제대로 된 성인전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그동안 나온 각종 자료들은 대부분 시복시성 추진을 위한 자료집 차원의 문헌들로 내용이 어렵고 일부 출간된 서적들은 신학적 깊이나 학문적 성과의 토대가 부족해 일반 신자들을 성인들의 삶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성인전의 마련이 절실하다. 다행히 최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신유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전기집을 발간할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순교자의 삶은 성인전 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등의 소재 로도 훌륭한 만큼 다양한 문화 양식을 통해 예술적으로 구현할 필요도 지적되고 있다. 아울러 현대적 감각에 맞춰 인터넷이나 멀티미디어 매체를 통해서도 순교자의 신앙과 삶을 다룬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성지순례는 103위 시성 이후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 중 하나이다. 성지는 순교자들의 삶의 체취를 가장 짙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으며 특별히 공동체적인 신심운동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어 일선 본당에서 가장 유용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정착돼 있다.
한국교회의 순교신심 운동이 나름대로 부문별로 성과를 거두면서 진행돼 왔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신자들의 신앙 생활과 영성 안에 순교신심이 뿌리를 내렸다고 보기에는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제2의 시복시성운동을 범교회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이 시기를 한국교회 순교신심의 활성화를 위한 또 하나의 전기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성인의 영광에 오른 103위 성인을 기려 그 빛나는 삶을 본받는 것은 물론 다시금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는 초기 순교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현양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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