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진 신심의 텃밭이다. 따라서 이들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본받고 실천할 때 한국 교회도 더불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생명을 받쳐 신앙을 지켜낸 여러 순교 성인들 중에서 임치백, 김루시아, 김기량의 생애를 시리즈로 소개하고자 한다. 순교자들의 신심과 영성을 널리 전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기획은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 특히 이를 통해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신자 들이 한국 순교자의 영성을 일깨우고 본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십계명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신자란 말인가?』 심문중이던 포도대장이 강하게 임치백을 추궁했다. 오랜 심문과 옥살이로 몸이 만신창이된 그는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신자가 된지 아직 열흘밖에 되지 않아 기도문을 외우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의 참 아버지란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려하는데 십계명 못외운다고 무엇이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임치백 성인의 신앙고백이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의 순교 영성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그의 한국적 순교 영성이다. 결국 우리의 신앙이 명쾌하면서도 심오하고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가 신앙고백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교리적 지식은 보잘 것 없었지만 어떻게 하느님을 공경하고 따라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1803년 서울 한강변의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성 임치백(요셉). 당대 거상(巨商)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던 그는 1830년 처음 천주교를 알게됐지만 입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도와주기도 하면서 큰 호의를 베푼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다 1846년 5월, 선주(船主)인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되자 아들이 갇혀 있던 옹진수영(甕津水營)을 찾아갔다. 당시 임성룡은 김대건 신부가 해로를 개척키 위해 바다에 나갔을 때 배를 빌려준 죄목으로 함께 체포됐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은 임치백이 천주교에 입문하게된 계기가 자식에 대한 애절한 사랑에서 비롯 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 당시 상황이다. 임치백은 관가에서 『우리 아들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살려달라』고 청했고 관가에서는 『안된다』며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가 요청하자 옹진 수영은 『당신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서 아들과 감옥에서 만나면 되겠네』라고 농담삼아 얘기했다. 이 말에 임치백은 『그러면 나도 천주교 신자요』라며 감옥에 넣어줄 것을 청했다. 이때 당황한 옹진수영은 이를 간곡히 만류 했으나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그를 옥에 투옥했다.
이처럼 그는 자식을 만나기 위해 교인이라 속이고 자수 했던 것이다. 신심의 발로였다기 보단 핏줄에 대한 애정 때문에 우연찮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됐다. 그리고 감옥에서 임치백은 김대건 신부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그는 김대건 신부를 통해 진정한 신앙인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됐다. 임치백 성인은 김대건 신부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강론을 듣고 즉시 세례성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동안 자신의 삶이 얼마나 헛되게 살았는지를 비로소 절감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다 그만두겠지 생각하던 옹진수영은 몇번 그에게 『그만 고집부리고 옥에서 나오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신앙을 가진 신자였기에 『천주교 신자인데 어떻게 나갈 수 있느냐』며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기본적인 교리지식은 없었지만 마음으로 진정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관가는 그의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을 불러 임치백을 설득케 했고, 이마저 되지 않자 동료 상인들을 불렀으나 결국 허사였다.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난 임치백 성인이 이미 순교할 결심을 한 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김대건 신부의 감화력이다. 단순히 아들을 만나기 위해 옥에 들어 갔던 그를 순교 성인으로 이끌 수 있었던 김신부의 사제 영성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1846년 9월 20일 정오부터 해질 때 까지 매를 맞은 후 포청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오른 임치백 성인은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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