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와 신앙에 관한 연구 - 조광(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5·16 쿠데타 세력, 장면 총리 부당 평가
장면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결과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제2공화국의 무능이나 부패, 장면 개인에 대한 우유부단의 비난은 5.16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강조됐던 것이다.
그는 종교운동가이자 교육운동가인 동시에 특출한 외교관이었다. 1948년 제3차 유엔 총회 파견 대한민국대표단 수석 대표로서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받기 위해 테러 위험을 감수하고 바티칸 등의 협조를 이끌어냈다. 1949년 대한민국 주미 특명 전권대사로 부임해 30여개국으로부터 대한민국에 대한 개별 승인을 이끌어냈다. 또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 참전에 크게 기여했다.
정치인으로서 장면은 1946년 민주의원의 의원, 입법의원의 의원으로 시작됐다. 1950년 11월 국무총리로 재임했고 1955년 민주당 창당과 함께 최고위원에 부임했고 다음해에 부통령에 당선됐다. 자유당 치하에서 반독재투쟁의 최일선에 섰다.
4·19 직후 부통령직을 사임했고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로 선임됐다. 이 기간 중 민주주의를 실천했고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워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했으나 5·16 쿠데타로 실각, 정치 일선을 떠나 1966년 6월 4일 서거했다. 부모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가진 장면은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받았고 미국 유학 중 맨허턴 대학에서의 교육을 통해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과 철학에 접근했다. 그의 신앙에서는 순교자 영성과 수도자적 복음3덕의 영성이 특징적이다. 1925년 조선순교복자 79위 시복식에 조선 신도 대표로 참석했고 1931년에는 「조선천주공교회 약사」를 저술했다.
1921년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한 후에는 수도회 영성에 의해 신앙과 삶이 이끌어졌다. 그의 삶을 보면 수도자적 영성을 세속 안에서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을 살았던 인물로서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결정된 전통적 신앙을 지녔다. 하지만 타종교에 대해서도 개방적 자세를 견지하는 등 편협되지 않고 개방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특히 그는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정리=박영호 기자>
■ 외교활동에 관한 연구 - 최운상(동경국제대학 교수·법학박사)
6.25 後 국가재건 위한 외교 노력 탁월
1948년 12월 12일 열린 제3차 유엔 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도록 한 데에는 장면 선생을 수석 대표로 한 한국 유엔 대표단의 활약이 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주미대사로 임명된 장면 선생은 워싱턴을 중심으로 활발한 승인 외교를 전개했다. 국제법상 대한민국은 유엔이란 국제 기구의 승인 이외에 국제 사회의 독립 국가들로부터 개별적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1949년 당시 한국의 재외 공관은 장면 선생이 대사로 있던 주미대사관뿐이었다. 따라서 이 승인 외교는 전적으로 워싱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장면 선생은 이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장면 선생은 또 6·25가 나자 유엔 안보리에 연설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군사적 원조를 호소했다. 6월 27일 안보리의 결의를 이끌어낸 장면 선생의 활동은 만고에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6월 30일 저녁 미국이 한국전 참전을 발표하고 주일 미 제24사단을 한국 전쟁에 투입하게 하는 등 한국을 지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장면 선생의 또 하나의 공헌은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 재건의 기초를 확립한 것이다. 장면 대사는 유엔총회에서 동분서주 노력해 유엔 총회가 1950년 10월 7일자 결의로 유엔한국위원단을 개편하여 7개국(호주, 칠레, 네덜란드, 파키스탄, 필리핀, 태국, 터어키)으로 구성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을 신설하도록 해 전후 복구사업에 착수할 수 있게 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 워싱턴에서는 매월 미국 주재 한국전쟁 참전국 대사들이 미국무부에 보여서 각종 회담을 했는데 장면 선생도 매일 참석해 한국에서의 전쟁 재발을 막았다.
장면 선생의 외교의 특징은 유엔을 통한 외교이다. 북한 핵무기, 미사일 개발 등의 문제는 한반도의 틀을 넘어 세계적인 문제이다. 그는 한국문제가 유엔에서 토의되고록 함으로써 국제적 문제가 되도록 한 장본인이다. 유엔 총회 결의를 통해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낸 것은 그의 탁월함이다.
<정리=서상덕 기자>
■ 장면의 정치활동과 사상에 관한 연구 - 허동현(경희대 교수)
민주 제도·가치 실현시킨 선각자이자 정치가
올바른 장면상(像)의 정립을 위해서는 쿠데타를 초래한 「무능한 정치가」라는 결과론적 인식틀에서 벗어나 그의 정치적 이상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라는 정신사적 척도에서 평가돼야 한다.
장면은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확립, 민간주도형 경제 건설, 관용과 대화의 정신, 합리적 통일 방향의 제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제고 등을 보편적인 방향과 원칙 하에서 실천하려 한 이상적·선각적 정치가였다. 그는 자유당 일당 독재에 맞서 국민참정권의 회복에 공헌했고, 제2공화국 내각 수반으로서 다원적 민주사회의 확립을 도모했다.
「경제제일주의」를 표방, 장기적인 경제 개발 계획을 입안 실천했고 특히 이를 관 주도가 아닌 민간 자율 방식으로 실천하려 했다. 사회적으로도 자유당 치하에서 위축돼 있던 각 이익집단과 사회단체들의 분출하는 욕구를 권위주의적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을 통한 자율적 해결 정책을 구사했다. 아울러 반공주의적 무력통일론을 넘어 합리적인 분단 해소 노력을 전개했다.
민주주의에 입각한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구현을 다시 한 번 시도하고 있는 오늘, 장면과 민주당 정권은 정신사적 차원에서 민주적 제도와 가치들을 한국 사상 최초로 실천하려 했던 정치가이자 정권으로 평가돼야 한다. 한편 장면의 정치사상은 크게 그리스도교적, 자유민주주의적, 국제주의적 요소로 구분된다.
그의 사상과 생애를 관통하는 기본 정신은 그리스도교적 정신의 구현과 실천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참된 구현의 관건은 한 국가와 사회에 진정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실현에 결부돼 있다고 생각했다. 또 시민의 자각에 기반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장면의 선각적 정치사상은 쿠데타로 좌절됐으나 한국 민주주의 발달 과정에서 등대의 역할을 했다.
그는 또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각해 국가를 초월한 인류의 평등을 지향하는 국제주의적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신념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과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낸 힘이었다.
<정리=박영호 기자>
■ 국제연합의 대한민국 승인과 장면의 역할 - 유태호(국제개발기구)
48년 유엔의 ‘합법정부 승인’에 결정적 기여
장면 선생은 소련 등 공산권의 비협조와 영연방 국가들의 반대 등 불안한 국제정세 속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주춧돌을 놓은 존재로 각인된다.
1948년 9월 1일부터 30일까지 열린 UN총회 3차 회기에 대한민국의 수석 대표로 함가해 UN이 한국의 발전을 지원하도록 하는 내용의 초안을 제출하고 UN회원국들이 대한민국의 승인에 찬성할 것을 주장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UN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UN이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충분한 군대의 장비와 훈련에 대해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군이 충분히 훈련되기 전에 미군이 철수하는 것은 이미 잘 무장된 북한군의 위협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그의 지적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의 이런 활동을 기반으로 Un총회는 1948년 12월 12일 195호 결의안을 승인하고 대한민국의 적법성을 선언하게 됐다.
또 장면 선생은 맥아더 장군의 일본 민정 고문으로 일한 바 있는 번 주교와의 돈독한 관계와 밀접한 협조를 통해 바티칸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하는데 공언했으며, UN총회 3차 회기에서는 바티칸의 외교적 역량을 이끌어내 한국 대표단을 지원하도록 했다.
또한 그는 1949년 1월 5월 워싱턴 한국 대사관의 개소를 위한 한국 주미 특별대표로 지명돼 미국 가톨릭복지협의회(NCWC)와 미국 주교협의회의 도움을 이끌어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의 취임식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는 등 다각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전 세계 국가의 54%에 해당하는 약 30개 나라로부터 개별적으로 승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첫 주미 대사로서 미국 정부가 UN군의 지휘를 맟게 하고 안보리에 개입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만민국 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한 UN결의를 기초로 UN군이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정리=서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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