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한 북한 공산군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평양 인근까지 밀려가던 1950년 10월 8일. 다른 식구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11시경이었다. 서정요(프란치스코.당시 61세)는 평양시 선교리 자신이 일하던 양조회사 사택의 문을 두드린 북한 정치보위부원을 따라 나섰다.
『회사 일로 잠깐 물어볼 것이 있으니 나와달라』는 말에 아무 의심 없이 나선 길이 마지막이 됐다. 1시간 뒤 앞서 왔던 이가 재차 방문, 셋째 아들 경석(마르코)을 데리고 나갔고 이를 의심스럽게 생각한 큰 딸 원석(요셉) 수녀도 동생의 뒤를 밟아 나갔다가 모두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같은 날 같은 시각 양조회사 사택에 살던 다른 직원도 끌려갔다가 훗날 어느 굴에서 총살당해 버려진 것으로 보아 필시 아버지와 함께 두 남매가 모두 북한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짐작된다. 가족 중 3명이 한꺼번에 끌려가 희생된 것이다.
이에 앞서 1949년 12월 7일에는 장남 서운석(보니파시오) 신부가 공산군에 의해 체포, 연행됐었다. 이로써 남은 가족은 삼녀 예석(가밀라)와 막내 우석(요한), 그리고 폐결핵으로 투병 중이던 완석 셋 뿐이었다. 둘째딸 의석(아퀴노)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허원 1년 뒤 폐결핵으로 선종했다. 실로 서정요의 가족은 6.25를 전후해 병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여규식(마리아) 외 서씨와 7남매 등 일가족 8명 중에서 절반이 넘는 4명이 북한 공산군에게 희생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큰 아들 서운석 신부(당시 평양교구 관후리본당 주임)가 박용옥 신부, 이재호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 의해 끌려가는 수난과 아픔을 겪고서도 서정요 프란치스코는 당시 정치보위부원들의 감시 속에 연금 상태에 처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수녀들을 방문하고 보살폈다. 당시 성직자들이 끌려가면서 평양 시내 본당들(관후리, 대신리, 기림리)은 모두 폐쇄됐고 이곳에 파견됐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에도 정치보위부원들이 오가며 수녀들을 감시했기 때문이다.
서프란치스코는 1890년 1월 8일 강원도 풍수원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 집안은 병인박해 때 조부모가 박해를 피해 풍수원에 정착, 내내 옹기 굽는 일을 생업으로 살아왔다. 어린 나이인 14세 때 동갑인 부인과 결혼했고 슬하에 모두 7남매를 두었다. 그들 가족은 삼촌 서병익 신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봉사를 해왔다. 그러다가 1925년 경 그의 가족은 삼촌 신부와 헤어져 평양 서포(西浦)에 세워질 교구청 신축 공사 일을 보게 됐고 그 후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살림을 도왔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몹시 가난해 늘 생활이 어려웠고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했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 또한 매일 아침 온 가족이 함께 조과(早課)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하는 등 독실한 신앙생활 속에서 성가정의 표양을 보여주었다.
서프란치스코의 깊은 신심과 모범적인 생활, 엄격한 교육 속에서 자라난 7남매는 모두 이웃의 부러움을 살 만큼 훌륭하게 성장했다. 특히 큰 아들 운석과 4남 우석은 성직자가 됐고 큰 딸 원석과 둘째 딸 의석은 수도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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