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삼준(崔三俊, 프란치스코) 회장은 1930년대부터 평양교구에 몸담아 교육 사업과 교회 사업에 20여년간 헌신했던 모범적인 평신도로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돼 행방불명됐다.
북한 공산 당국의 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하던 1949년 5월14일 홍용호 주교의 불법 납치를 시작으로 부감목 김필현 신부, 최항준 신부가 체포되자 평양교구내 각 본당 신부들은 비장한 각오로 교회 사수를 결의하고 본당을 지켰다.
지병으로 4월부터 평양 기림리 주교관에서 휴양 중이던 강계 본당 주임 석원섭 신부도 서둘러 본당으로 귀임했는데 긴 여행으로 인해 병이 악화돼 병상에 눕게 됐다. 7월 8일 최삼준 회장은 석신부를 문병하러 본당에 들렀다. 당시 본당에는 간호원 몇 명이 사제관에 상주해 석신부를 돌보고 있었고 청년 신자 대여섯명이 교회와 본당 신부를 지키기 위해 성당 제의방에 머물고 있었다. 최회장은 석신부를 문병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 연행됐다. 몇 시간 뒤 병상에 누워있던 석신부도 비밀리에 뒷문으로 납치됐고 이튿날 새벽 5시경에는 여러 명의 정치보위부원들이 몰려와 청년신자들과 간호원들을 감금하고 교회 건물과 재산들을 모두 몰수했다.
최회장이 본당 주임 신부보다도 먼저 납치될 정도로 공산 당국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신자들에게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격려한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공산당의 탄압으로 교우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월남하는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좬언젠가는 통일이 되어 좋은 세상을 볼 날이 있지 않겠는가?좭라고 격려하며 교회를 지키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평소부터 굳은 신앙과 교회의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그의 이러한 굽히지 않는 신앙심으로 공산당국은 본당 주임인 석 신부보다도 그를 더 위험한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게 됐던 것이다. 최삼준 회장은 1907년 부친 최경집(빈첸시오)와 모친 이봉조(마리아)의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상지대학 예과 2년을 수료하고 귀국해 평양 성모 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평양교구와 인연을 맺었다. 그후 7-8년간 교사로 헌신하던 그는 가톨릭 소년단(보이스카웃)을 조직하기도 하고 성극단과 합주단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 동안 부인 변안나와 결혼해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교사직을 그만둔 뒤 한 때 직조공장을 경영하던 그는 평안북도 강계(江界)로 이주해 본당 신부를 보좌하며 교회 활동에 헌신한다. 그는 본당 유치원 운영에 적극 참여하면서 본당 총회장을 맡고 성가대를 이끄는 등 교회 활동에 전념했고 자신의 본명보다는 세례명에서 딴 「자백(慈伯)」이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다른 많은 희생자들과 함께 그의 가족은 가장을 잃고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최회장의 부인은 남편의 피납 소식을 듣고 크게 상심했으며 한달 뒤 남편의 소식을 알아보려 강계역으로 나왔다가 정거장 대합실에서 졸도해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그 후 어린 두 아들의 소식도 아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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