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북과 남의 통일은 6.25라는 민족적 비극으로 인한 잘못에 대해 서로 진심으로 뉘우치는데서부터 첫발을 내디딜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 과정이 배제된채 통일을 논의한다는 것은 결과를 원하지 않는 소망을 갖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13대 서울대교구장 정진석대주교는 7월4일 본지와의 특별 대담을 통해 침묵의 교회, 북녘교회와의 일치, 나아가 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와 소신을 피력했다.
지난 6월29일 성 베드로 바오로 대축일을 기해 제13대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한 정진석대주교는 신도 130만을 거느린 거대교구의 교구장으로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의견을 열심히 수렴한후 구체적인 방침들을 세워나갈 계획이라고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아울러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황해도 일원을 관장하는 사목자로서 의미있고 확신이 담긴 견해를 밝혔다.
서울대교구청 집무실에서 약 한시간에 걸쳐 진행된 특별 대담에서 '일치와 친교를 이루는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사목 현안을 풀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한 정대주교는 이밖에 경제위기 시대를 살아나가는 지혜 등을 폭넓게 제시했다.
=대주교님의 서울대교구장 착좌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먼저 착좌 소감과 고향인 명동성당으로 돌아오신 감회를 듣고 싶습니다.
▲참으로 큰 책임을 졌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지난 30년동안 서울대교구장 자리를 지켜오신 김추기경님이 정말 큰 인물이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큰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신 김수환추기경님께 새삼 존경을 드리고 싶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이루신 업적이 저로 인해 흠이 가지 않도록 잘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시다시피 명동은 제 고향입니다. 68년 유럽으로 유학갔다가 70년 청주교구장이 되면서 명동을 떠났으니 30년만에 되돌아온 셈입니다. 지난 30년간 서울이 너무나 발전,고향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생소한 느낌입니다. 새롭게 배울 것이 많을 것으로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주교님의 사목방향과 지향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좀 이르긴 합니다만 대주교님께서 가장 역점을 두시고자 하는 사목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무엇보다도 가족간의 대화가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합니다. 가족간의 대화결여는 우리 신자 뿐 아니라 국민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혼한 5쌍중 1쌍이 이혼하고 연간 150만건에 달하는 낙태, 게다가 여아에 대한 선택적 낙태는 세계에서도 우리나라가 가장 심각한 현실입니다. 더욱 문제인 것은 종교인이라고 이 현실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실제생활과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지난번 아시아 주교시노드에서 이 사실을 보고했을때 아시아 여러나라 주교님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습니다. 주교님들의 놀라는 모습에서 저는 한국의 기본적인 생명존중 상황이 여타 아시아 나라들에 비해 훨씬 열악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다시 놀랐습니다.
따라서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쉽게 만나서 사랑과 정을 나누는 가족 공동체의 회복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성함 알기, 생신일 알기 같은 캠페인을 펼치면 어떨까 합니다. 손자 손녀들을 가르치는 1등교사가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갈등과 이혼문제, 자녀교육 등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의 훌륭한 몫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가정의 회복,그것이야말로 생명을 지키는 가장 기초적인 선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주교님께서는 착좌식때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또 황해도 일원을 관장하는 책임자로서 상당한 비중과 애정을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같은 의지는 초대 교황사절 번 주교님의 목장(주교지팡이)을 사용하시는 것으로 이미 감지가 됩니다.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문제, 민족화해문제, 그리고 북한교회 재건문제 등에 대한 주교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먼저 통일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실 때 이뤄질 것입니다. 통일을 휘애서는 서로의 마음을 열어야 하는데 아무리 인간적으로 노력해도 마음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도록 하느님께 떼를 쓸 작정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남과 북 서로가 6.25라는 민족적 비극으로 입은 상처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뉘우침이 있을 때 용서가 가능하고 화해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며 비로소 마음이 열린 대화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통일을 향해 우리가 걸어야 할 과정이라고 여깁니다.
아울러 북녘에도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믿음의 자유, 직업선택과 여행의 자유 등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기본적인 인권이 부여되어야 하며 그같은 방향의 통일을 위해 교회가 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만일 지금 상황에서 덜컥 통일이 된다면 가장 먼저 퇴폐업소들이 북녘 땅을 밟을까봐 겁이 납니다. 통일은 우리 민족 전체가 건실하고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평양교구장 서리로 5년에 한번 관할지역을 순방하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역시 하느님께 떼를 써볼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IMF 경제위기로 벼랑끝에 몰려 있습니다. 어떻게 이 경제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또 교회는 어떤 방법으로 고통받는 실직자들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겐 가난하게 살아도 행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 요즘에는 돈이 없다고 쉽게 이혼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금전이 하느님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탓이라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아무것도 모자람이 없이 살았습니다. 나눔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교회는 바로 이 나눔의 정신을 살면서 국민전체에 이 나눔의식이 확산되도록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앞서 지적한 가정의 문제도 결국 대화의 부재가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요. 저는 IMF 시대를 살면서 우리 모두 텔레비전을 끌 수 있다면,텔레비전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된다면 보다 쉽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IMF 경제위기는 그동안 우리가 물질의 주인으로 살아왔음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물질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전화위복의 시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명동성당이 시위나 집회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사람들은 교회안에서 진보와 보수로 의견이 나뉘어지는 현상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만.
▲법률자체도 완전무결할 수가 없고 그 법률적 판단을 하는 사법행위도 완전무결할 수 없기에 인간사회에서는 항상 억울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호소할 장소가 어딘가에는 있어야 합니다.
그 장소는 국민의 합의 또는 공권력으로 지정될 수 있습니다. 명동성당은 국민들이 스스로 성역으로 인식해 왔으며 교회는 한번도 명동성당을 성역으로 지정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명동성당에 가면 억울한 사정이 하느님의 귀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있고 경찰들도 그 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윤리적인 그 선을 넘어오지 않는것은 국민의 공감대가 그 선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입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인정하는 명동성당이 성역으로 계속 유지되려면 여러 계층이 함께 노력해 주어야 합니다. 명동성당에 들어와 하느님께 호소하는 사람도 그 성역이 유지되도록 처신해야 성역의 유지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역으로 들어온다고 무조건 보호받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 죄인으로 지탄받는 사람은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가족안에서도 의견은 항상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독단적인 것이 아니고 의논한다는 것은 의견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무색의 태양 빛도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7가지 색으로 나타나지만 원래는 하나의 색깔입니다.
가족끼리 공동선을 위해서 의견을 합칠때 행복한 집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교회안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느님의 이름으로 결단을 내릴때는 의견이 한 곳으로 모아집니다.
=교회의 대희년 준비가 한창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대희년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2천년 대희년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물론 죄에서 해방된 기쁨은 나 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자인 우리 모두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되신 은혜를 우리 각자가 체험할때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희년은 죄에서 해방된 기쁨과 해방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시 성급한 질문입니다. 현재 서울대교구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언제쯤 대주교님의 사목지침과 교구 운영방침을 접할 수 있겠습니까
▲일치와 친교,즉 하나됨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는 아주 큰 교구이기 때문에 교회가 생명처럼 여기는 일치와 친교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만5천명이 넘는 본당에서 친교를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일치와 친교는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의미합니다. 교구장과 신부, 신부와 신부, 신부와 신자, 신자와 신자, 그리고 가족과 가족안에서 일치와 친교가 이루어질때 교회는 가치가 있습니다.
교구장의 사명은 여러단계의 일치와 친교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앞서 지적대로 한국교회의 1/3에 해당하는 규모의 큰 신앙공동체로서 서울대교구는 하느님의 사랑 한마음 한가족의 정신이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가급적 보다 많은 신부님들과 평신도들의 의견을 열심히 들으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상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따라서 교구에 대한 사목방안과 구체적인 운영방침은 금년말쯤에 세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2년 대홍수 당시 충북지역 피해가 심할때 굶어죽게 된 수재민들을 어려운 교구형편상 조금밖에 도와주지 못했던 사실을 아직도 가슴 아파하는 정진석대주교는 74년 지학순주교가 정권당국에 의해 체포됐을 때를 사제서품후 가장 어려운 때로 꼽았다.
반면 6명이었던 청주교구의 사제가 1백명으로 늘어난 지난해를 가장 기뻤던 기억으로 지목하는 정진석대주교.
정대주교는 친 외가 모두 4대째 이어온 신앙의 명가답게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하는 신앙안에서 서울이라는 거대교구를 순리대로 이끌어 가겠다는 자신의 포부를 힘있게 펼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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