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말 그대로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그런 만큼 순교자 신심은 한국교회 고유한 신심을 형성해 왔다. 이미 초기 교회 때부터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복음과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최고의 신앙 행위로 받아들였고 수많은 한국 순교자들은 그들 동료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소지품을 보면 그들이 다른 순교자들의 유품을 소중히 간직했음을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순교자 현양이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 지기 시작한 것은 1831년 조선교구 설정 이래 서방의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뮈텔 주교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 들의 현양 운동은 1925년 한국 79위 순교자 시복으로 그 첫 결실을 보았다.
하지만 그 후 일제의 탄압과 식민통치의 지속으로 인해 한국교회의 순교자 현양 운동은 침체기에 들어갔고 1946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백주년을 맞아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의 발족을 보기까지 이렇다 할 결실을 얻지 못해 왔다. 그후 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창설돼 순교자 현양에 전념 하기 시작했고 1964년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설립돼 순교자들의 업적과 신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는 이어 병인순교 1백주년을 맞아 절두산 기념성당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고 한국 순교자 24위 시복을 전후해 기념성당 건립 운동이 전국에서 전개되기도 했다. 1984년 마침내 103위 시성의 영광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 한국교회의 순교자 현양은 그러나 이후 순교신심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들 103위 시성에 이어 신유박해 순교자 들을 중심으로 제2의 시복시성운동을 범교회 차원에서 펼치고 있다. 이미 대부분의 교구에서는 나름대로 꾸준하게 추진해온 시복시성 청원 대상자 명단을 주교회의 사무처에 제출했고 일부 교구는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시복시성 추진을 허락받은 상태이다. 각 교구별로 독자적으로 이뤄져오던 시복시성 청원 추진 작업이 일부 대상자의 중복 등 약간의 문제점을 안고 있어 지체되기도 했으나 주교회의가 정기총회에서 각 교구별 조사 작업 후 최종적인 청원서는 한국교회 전체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제출한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교회사 학자 들과 각 교구 추진 담당자들이 나름대로 이룩한 연구 성과 들은 이제 종합적으로 정리되고 수집되어 한국교회의 시복시성 청원의 토대를 이룰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103위 성인 탄생에 이어 또 다시 한국의 성인들이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와 열망을 갖고 스스로의 삶이 순교자의 신심에 따라 살고 있는지를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많은 신자들은 103위 시성 당시의 환희를 이미 망각하거나 또는 당시의 감격을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세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막상 시성이 되고 나면 그 삶과 신앙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선조들의 신앙이 생활 안에 체화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복시성 추진 작업 자체가 일부 관계자 들만의 열정에 의해 이뤄지거나 단순히 학문적 연구, 행정적 처리만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시복시성 추진 자체가 지역 교회 신자들의 순교 신심을 고양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현양 프로그램과 교육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며 오늘을 살아 가는 현대인들이 순교자의 신심을 어떻게 삶으로 드러낼 것 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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