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이후 첫 파병되는 상록수부대의 일원으로 한국땅을 떠나는 날, 약간의 긴장감이 스며왔었다. C-130 군수송기 안은 엔진 소리만 요란할 뿐 말하는 이가 없었다. 『과연 아무 일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옆으로 길게 뻗은 의자에 빼곡이 끼어 앉아 묵주알을 굴리며 제발 모두가 소임을 마치고 건강히 귀국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이 곳에 파병되기 전까지 동티모르 문제에 대해선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다. 무고한 신자와 성직자, 수도자들이 죽어가는 동티모르 사태를 TV를 통해 보면서도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재난과 분쟁, 그런 슬픈 비극 중의 하나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순수함과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주민들을 직접 대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서 사랑을 전하고 도움을 줘야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제의 통치와 6.25를 체험하고 지금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고 더구나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인 그들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함께 하고 있는 이들 중에는 비신자도 많고 타교파 신자들도 많지만 군종신부를 좋아하고 잘 따라주고 있다. 이들은 군종신부가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을 받는다는 말을 하곤 한다. 보통 열댓명이 한 천막 안에서 야전 침대 생활을 하고 있다. 현지 적응 중의 어려움은 식사문제였다. 매일같이 양식 위주로 나오는 식단. 제대로 식사를 못하는 우리를 위해 식당에서는 태국산 매운 고추를 갈아 식탁에 내놓았다. 그러던 어느날 공수되어온 김치, 김치만 한접시씩 먹은 우리는 행복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우리가 주둔한 이후 주민들의 생활은 급속히 안정되어 가고 있다. 산으로 피신했던 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물물교환이 이뤄지는 소규모의 시장도 다시 섰다. 주둔지에는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돈보스꼬학교와 성당 한 곳이 있다. 4명의 사제와 수녀님들이 활동하고 있다. 천주교신자가 대다수인 이 지역에서 신부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때문에 적절한 대민지원활동과 치안작전을 위해선 각 마을 촌장과 신부님들과의 협조가 절실하다.
돈보스꼬학교를 방문했을 땐 가슴 뭉클한 체험을 했다. 나무십자가가 꽂힌 작은 무덤 여섯기가 정문에서 우리를 맞았다.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받을 아무 대책없이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사목하다 죽어간 「순교자」들의 무덤이었다. 『왜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약한 자의 편에 섰을까』 묵상하며 각오를 새롭게 하기도 했다. 아직은 부대 시설을 세우고 정리하는 단계이지만 앞으로는 주민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당장 주민들에게 필요한 샌들, 여름옷을 비롯해 학생들을 위한 학용품, 복사기, 컴퓨터 등에 대한 지원 요청을 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많은 지원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아직까지 큰 분쟁없이 평화 정착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 많은 이들의 기도 덕분이라고 확신한다. 이 곳에 오면서 많은 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었다. 신자들의 기도 후원은 부족한 내가 믿고 살아가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한국 교회 전체가 동티모르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얼마 전 딜리에 계신 벨로 주교님을 만나 전해드렸다. 오늘도 주둔지 정리작업에 땀방울을 흘리는 병사들을 찾아다니며 격려하고 돌아왔다. 등을 두드리며 사탕과 껌을 건네주자 모든 피로를 한순간에 잊은 듯 환히 웃으며 고마워하는 병사들을 보며 군종신부로서 보람을 느끼게 된다.
과거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많은 외국의 형제들로부터 격려와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의 힘이 되어주어야 할 때인 것 같다. 파병된 모든 군인들도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인류애를 실천한다는 사명감과 긍지를 가지고 더위와 싸워가며 봉사하고 있다. 다시 한번 신자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리며 이곳 동티모르에 하루속히 주님의 평화와 일치가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