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 산하 한국사목연구소와 가톨릭문화학회는 9월30일 오전 10시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를 주제로 대희년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한국전쟁과 천주교회'를 다룬 이번 심포지엄은 지난해 11월6일 열린 첫 심포지엄에서 일제 시대까지의 한국교회사를 다룬데 이어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교회의 실상과 전후 활동 등에 대해 5개 주제의 발표로 진행됐다. 각 발제문 요지를 소개한다.
■ ‘외국 가톨릭교회의 전쟁 복구활동’ . 장정란 교수
외국원조는 한국교회 사회사업 모범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이 받은 외국 원조는 약 17억4500만불로 GNP의
8%에 해당되며 1957년부터 1961년까지 5년 동안 원조 수입이 차지한 비율이 전체 정부 세입의 45.5%로 제1의 세입원일 정도로 당시 원조가 한국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외국 가톨릭교회의 원조는 미국 NCWC(가톨릭복지위원회)의 가톨릭구제회(CRS)가 가장 큰 역할을 했으며 오스트리아 부인회, 독일 미세레오르 등이 주요한 원조기구였다. 외국 가톨릭교회의 구호활동을 시기적으로 보면 한국전쟁 발발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1953년 7월까지 1기에는 식량, 의류, 의약품 등 긴급 구호물자가 중심이었다. 휴전부터 1950년대 말까지 제2기에는 수많은 피난민 등의 정착과 자활 사업이 중요한 시기로 토지개간사업, 주택건설사업, 직업교육 등의 원조가 추가됐다. 제3기인 60년대에는 한국교회의 사회 사업이 가톨릭구제회의 적극적 지원 속에 본격 시작됐고 이에 따라 외국 원조 단체의 활동은 점차 한국교회와 정부로 이관됐다.
이러한 외국 원조의 효과는 첫째 수많은 한국인들이 기아, 한파, 질병으로 인한 죽음에서 보호됐다. 둘째 이들의 원조와 헌신적인 봉사활동은 인종, 국가, 종교를 초월해 이뤄져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대다수 한국인에게 그리스도적 사랑을 알렸고 교세 증가에 크에 기여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외국 가톨릭교회의 원조 활동이 한국 천주교회 사회사업의 모태와 모범이 되었다는 점으로 외국교회의 봉사활동은 한국교회로 성공적으로 이어져 교회의 사회사업은 그 범위를 국내 뿐만 아니라 국외에까지 뼏쳐가고 있다.
■ ‘해방정국과 한국 천주교회’ / 강인철 교수
일제청산에 소극적 태도 보여
미국의 임시 군사 정부가 남한을 직접 통치하던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의 약 3년 동안에 해당하는 '해방정국' 동안 교회와 미군정 당국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천주교회 지도자 들은 신자들에게 정치 영역에 적극 개입을 권장했고 참여의 방향을 반공주의, 친미주의 미국의 전후 한반도 구상에의 동조,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소극적 태도 쪽으로 유도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승만과 한민당 분파들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했고 실제로 미군정기에 교회는 우익세력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 하고 있었다. 이런 정치적 선택과 행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성찰의 대상이 된다.
첫째, 해방정국에서 한국교회는 분단을 '선(善)' 이라 주장하지 않았고 오히려 민족통일, 통일 국가 수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 으로 국토와 민족의 분단에 기여했다. 강력한 반공 주의적 태도로 인해 주어진 상황에서 민족 분단과 분단 정권 수립이 '불가피하다' 고 인정했다. 나아가 공산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전후 세계 질서를 '유신론 대 무신론의 필사적인 대결' 로 이해하고 반공 투쟁을 '십자군 전쟁' 으로 간주했다. 이는 '반공주의를 우상화' 하여 스스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천주교는 1920년대 이후 민족운동과의 유대가 거의 단절됐고 교회 지도자들은 일제 지배에 적극 협력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나 반성이 있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해방과 함께 제국주의 잔재 청산의 맥락에서 '친일파 민족 반역자 처단' 이 시대적-범민중적 요구로 제기된 상황에서 교회는 적어도 1930년대 이후의 신사 참배 문제와 전시 체제 협조 문제에 대해 정직하게 과오를 인정했어야 마땅 했다. 일제 지배 협력 과거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이고, 천주교 지도자들이 친일파 지주층의 집결지 였던 한민당에 대거 가입한 것은 친일파들과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게 될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를 냈을 것이다.
셋째, 당시 교회는 인구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의 토지개혁 요구에 대해서도 대세에 순응하면서도 소작료에 교회 재정을 상당 부분 의존하는 상태에서 대체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남한에서 1946년 10월 에 발표된 '좌우합작 7원칙' 의 제3조를 계기로 토지개혁 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경향신문은 특집을 통해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입장 표명을 유보하면서도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교회 당국은 막상 토지개혁으로 인한 재정 수입의 격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교회와 입장’ / 여진천 신부
강한 반공으로 적극 싸울 것 권해
당시 한국교회는 강한 반공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 뿌리는 19세기 세속화를 경계하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비판하던 교황들에게서 비롯됐다. 아우구스티노는 '정당한 전쟁' 의 5가지 기준을 제시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바탕으로 합법적 권위, 정당한 명분, 정당한 의도와 수단 및 방법을 정당한 전쟁의 3가지 기준으로 제시했다.
교황들의 반공산주의적 가르침이 한국교회에 전해 졌고 1930년대와 1940년대 공산주의로부터 박해 받는 여러나라의 소식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잔학상을 간접 체험했고 연길교회와 북한교회의 소식을 통해 직접 체험했다. 이로써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를 반그리스도교로, 공산주의자들을 악마로, 교회와 인간의 공적으로 인식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한국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의 반종교 적 실상을 직접 체험했다. 성직자가 학살되고 교회 시설이 점령되었으며 성당에서 독성행위가 자행됐다. 이러한 체험은 더욱 강한 반공주의로 표출됐고 한국 전쟁을 종교적 수난의 차원인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 이고 '정화와 성화의 수단' 으로 보았다. 결국 '철저한 말살의 신념' 으로 적극 싸울 것을 촉구 했다.
전쟁 후반에는 전쟁의 원인을 전통적 견해에서 더 나아가 '악마적 사상인 무신론 공산주의 사상' 이고 '동족 아닌 동족이 악마적 방법을 다해 일으킨 참극' 으로 보았다. 군인들은 십자군이었고 전쟁은 무신론 폭군에 맞서 '성전' 에 참여하는 '십자군 전쟁' 으로 규정했다. 교회는 반공이념 교육을 강화했고 이러한 입장은 두 차례의 전국 교구장 회의를 통해서도 강화됐다.
이러한 입장들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것은 첫째, 신자 들에게 깊숙이 내면화된 반공주의, 공산주의자들을 지구상에서 말살될 때까지 싸워야 할 대상으로 봄으로써 여기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할 근거가 없었 다는 것이다. 둘째는 무신론 폭군에 대항한 십자군 전쟁으로 규정하고 순교 정신으로 참전을 촉구한 반면 국군들의 비도덕적인 문제와 양민학살 등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을 했어야 했다는 점이다.
■ ‘선교 실상’/ 장동하 신부
휴전 이후 교세 급성장
한국교회는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시기에 세 가지 측면에서의 선교 정책을 실시했다. 우선 교회 지도부는 신심을 통한 교회 안정화 정책을 추진해 해방 후의 사회적 혼란과 전란 이후의 복구 과정 속에서 교회는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순교신심과 성모신심을 중심으로교회를 안정시켜나갔다.
둘째, 성직자 양성과 가톨릭 지성인 양성 정책을 들 수 있다. 신학교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 피난지를 옮겨 다니면서도 지속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또 한국전쟁으로 무너진 교회 조직을 일으키고 사회에 가톨릭 정신을 널리 알릴 지성인의 양성이 시급했다.
셋째,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기초한 정책으로 신자 보호 정책을 들 수 있다. 신부의 존재 이유는 우선적으로 신부들은 복음과 교회 정신에 따라 신자 들이 남아있는 한 죽음의 위험이 있을지라도 신자들과 함께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이고 이러한 가르침은 한국 전쟁 중에도 실천적으로 지켜졌다. 이는 나아가 우선적으로 피난 신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구제하는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이상의 세가지 선교정책 외에 교회는 의료봉사와 사회복지활동을 전개하고 군종 사목과 포로수용소 활동으로 전재민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정책들이 1944년부터 1962년까지 한국교회의 구성원의 변화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1953년 휴전 당시 남한 인구 중 신자수는 16만6471명 으로 전체의 약 0.78%였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는 매년 약 2만5500명의 증가가 있었고 1957년부터 1959년까지는 약 5만8000명, 1960년부터 1962년 까지는 약 3만7000명씩의 신자 증가가 나타났다.
따라서 휴전협정 이후 파괴된 국가 경제와 교회 공동체를 재건하던 시기 연평균 신자 증가는 약 4만명 가량이었다. 신자수 증가와 본당 증설은 성직자 증가로, 다시 본당 증설은 교구 분할을 가져왔다. 이처럼 한국 전쟁 이후 교회 복구와 재건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을 거듭해왔다.
■ ‘교회의 피해’ / 윤선자 강사
가장 큰 피해는 남북교회의 단절
남한 교회는 미 군정과 정권의 후원 아래 잘 조직된 반공 집단으로 나섰고 북한에서는 종교 규제와 탄압이 진행됐다. 1948년 남북에 각각 정권이 수립되고 38선이 가로 놓여 교회도 분단이 강요됐다. 그해 12월부터 탄압이 본격화됐고 성직자, 수도자들이 체포되자 북한 교회 신자들의 월남이 급증했다. 1950년 6월24일 북한의 모든 성직자가 체포되고 평신도들에 대한 체포와 살해가 자행됐다. 전쟁 발발 후 남한 교회의 피해는 6월말부터 9월 중순까지 두달 반 사이에 대부분 일어났다.
전쟁을 전후해 남북한에서 체포된 성직자, 수도자만 해도 한국인 48명, 선교사 98명 등 150명이다. 인적 손실의 규모 못지 않게 손실의 '질' 이 문제이다. 즉 지도급 인사들의 대규모 손실이다. 물적 손실면에서, 북한 교회는 거의 모든 교회 시설 들이 소실되거나 파괴됐다. 남한의 경우 교회 언론에 게재된 피해만 해도 34개의 교회 건물이 전소 또는 파괴됐고 건물이 그런대로 보존됐다해도 성물과 비품, 가재도구 등을 약탈 당한 곳은 헤아릴 수 없다. 전쟁으로 한국교회가 입은 최대의 피해는 남북 교회의 단절이며 5만여명을 헤아리던 북한교회가 망각된 것 이다.
전쟁 중 남한 교회는 북한교회의 제도적 소명을 공식적 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북한 지역 교구 후임 교구장으로 남한 인사들이 임명됐고 북한 수도회들이 남한에서 재건됐다. 이는 북한에 진실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재증명' 이고 교회 차원에서 분단을 제도화한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십자군 전쟁의 논리였다. 이에 따르면 무신론 세력의 물리적 소멸까지 평화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는 교회가 냉전 질서와 그 파생물인 분단 질서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사회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다. 이제 민족의 재일치와 평화는 북한 공산 세력을 물리쳐 야만 가능하다는 인식을 재고하는데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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