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도 신앙의 내용과 의의가 과연 무엇이냐는 물음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어둠과 불안에 싸여 있다. 일찍이 사회의 주요한 축으로 세상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는 힘이 되기도 했던 교회는 오늘날 중산층과 대형화의 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 신자들이 떠나는 현재 모습과 궤를 같이하며 위기의식마저 낳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늘진 곳을 찾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며 인류발전에 있어 권위를 가진 존재로, 가장 존경받는 존재로 자리잡아 왔다. 새로운 천년을 맞는 이 즈음에 신앙의 내용을 더듬는 것은 성서에서 밝히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위상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신앙인의 회개와 새로남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
세상 속에 깊숙이 자리한, 아니 세상 그 자체가 되어야 할 교회의 사회를 향한 가르침은 세상에서 갖는 교회의 역할이 한갓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라 사회에 있어「 구원을 위한 교회의 적극적인 현존」이라는 점을 웅변해왔다. 성서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4)으로 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언명은 사회가 발전돼 나가야 할 바를 제시하는 「방향 제시」라는 역할과 사회가 부패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사회 비판」의 기능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교회에 지운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는 일찍이 이같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가르침을 담은 사회교리를 『정의와 평화와 형제애의 원리 위에서 인간 사회를 재건하는 복음의 힘에 대한 증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사회교리가 교회를 지탱해온 많은 교리 중의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사상이 역사상 존재했던 여러 사회들과 관계하며 이어온 오랜 체험의 결과, 그리고 그 집대성이라는 사실을 들려준다. 이런 이유로 그간 신학자들의 사회 교리에 대한 접근은 교회의 기원 이후 「교도 직무 전체」 안에서, 그리고 수세기를 이어오며 축적된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 이뤄져 왔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반성」이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문헌은 『사회적 가르침은 사회 현실에 대한 교회의 반성을 우리 시대를 위해 표명하여 주는 것이며, 사회 현실을 복음에 비춰 평가하고, 사회 안에서의 실제적인 행동지침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사회교리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궁극적으로 사회교리는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의 지표를 제시하고 실천하도록 이끄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이유로 사회교리는 단지 신학적으로 고취된 가르침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실천을 포함하는 현실적인 가르침인 셈이다.
사회로부터 배우는 교회
「노동헌장」을 반포해 사회교리 가르침에 기초를 놓은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Inscrutabili」에서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인 사색과 인간 학문들의 보조를 받아 현세 사회를 책임지고 건설하라는 자신의 소명에 호응하도록 인도하고자 노력한다』며 세상 속에서의 실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눠진 신자들의 소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아울러 인류가 직면한 절박한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투신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1985년에 개최됐던 세계주교대의원회의(Synod)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아, 전쟁 등에 대해 『이런 징표들을 복음의 빛으로 해명하기 위해 더욱 심오하고도 새로운 신학적 반성이 요구되고 있다. … 새로운 상황에서 인간 발전과 관련되는 교회는 사회 교리가 무엇인가, 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며 반성과 실천을 촉구한 바 있다.
여기서 사회교리가 정적으로 고착된 사회 규범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풍부한 「발전 과정」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달리 말해 교회가 사회에 대해 고유의 정신적, 도덕적 교사로서 「가르친다」는 내포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교회가 사회로부터 배운다』는 뜻까지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회교리의 역사성
이런 사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이미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부각돼 왔다. 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과 생활 양식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자신을 「세상의 영혼」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회변혁의 근본 원리였으며 가톨릭이 지니는 힘의 바탕이 됐다. 이런 교회의 사회사상을 최초로 체계화시킨 이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다 . 아퀴나스 성인은 「신학대전」에서 정의와 법률 문제를 논한 바 있다.
이런 뿌리를 지닌 교회이기에 가톨릭 사상은 모든 시대 속에서 힘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노예 매매를 「중대한 범죄」로 낙인찍은 교황 비오 2세(1462년)와 식민지 확장으로 인한 원주민의 존엄성 침해를 비판한 교황 바오로 3세 등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듯이 교회의 세상을 향한 외침이 시대를 뛰어넘어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힘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도전과 교회의 반성
현대에 들어 교회의 사회에 대한 가르침은 복합적인 사회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가톨릭 신자들의 역량이 높아짐에 따라 대단히 풍부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새로운 도전들은 신자들에게 언제나 끊임없는 반성과 발전을 요구하고 있다. 『깨어 있어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그 어느 때보다 힘있는 실천으로 드러나야 할 때인 것이다.
시대의 복잡성을 반영한 사회교리와 이에 기반한 신자들의 새로운 실천은 어느 시대에나 사회를 변혁하는 힘이 됐다. 1886년 벨기에를 필두로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지로 번져 나갔던 가톨릭 노동조합운동과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의 근현대 국가체제 수립에 큰 역할을 했던 그리스도교 민주당 등에서의 신자들의 활동은 그 밑바탕에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단체로 외화된 신자들의 활동은 교회의 힘이 되고 있다.
새천년 교회의 과제
새천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신자들은 인류의 양심에 온갖 형태의 물질적 정치적 정신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새로이 불어넣을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에 앞서 신자 자신부터 복음으로 거듭날 것으로 요청하고 있다. 이는 복음 선포의 사명이 교회의 어느 특정한 부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나눠져야 할 십자가라는 진리를 새로이 확인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을 통해 늘 새로워지는 교회를 지향하는 길, 그것이 바로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교회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적절한 자기 위상을 내오지 못함으로써 교회 고유의 정신적, 도덕적 교사역마저 잃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 세상 속에서의 위상이 현저히 추락했다는 비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해 던지는 채찍이 되고 화살이 돼야 한다.
특히 한국사회는 70년대 지학순 주교로 대표되는 인권옹호투쟁, 80년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폭로 등으로 대변되는 민주화 도정에서 꺾일 줄 모르는 세상을 향한 외침으로 사회에 큰 반향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는 90년대 이후 시민단체의 활성화, 정권교체 등 복잡한 사회의 움직임 속에서 사회참여와 감시 기능이 상당히 약화됐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복음적 가치에 비춰 민중을 위해 거리낌없이 나서던 모습은 주춤거리며 스스로 어색해 하는 몸짓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어느 사회, 어떤 세상에나 있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 이들을 찾고 이들과 함께 하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늘 새롭게 돼야 한다. 이와 관련해 교황 바오로 6세가 회칙 「민족들의 발전」 76항(1967)에서 밝힌 『진보는 평화의 새 이름이다』는 언명은 한 세대가 지난 오늘 더욱 빛을 발해야 한다. 이 가운데 발전과 진보를 위한 보편적 「연대성」은 현대 사회 그리스도인이 쥐고 나가야 할 주요한 무기가 될 것이다.
빈부격차의 확대, 환경문제 등 본질적인 문제가 크게 바뀌지 않고 더욱 첨예화하고 있는 가운데 사회로부터 눈을 거두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방기하는 것이다.
구체적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육화시켜야 할 사명에서 애써 물러섬으로써 우리 역사에서는 친일적 모습으로,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는 마녀사냥이라는 희대의 비극 등으로 크나큰 아픔을 안겨준 교회의 모습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아름다운 세상은 아닐 것이다.
예수께서 오셨던 당시의 문제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오늘, 복음은 하느님나라가 오기까지 쉼없이 선포되고 모색돼야 한다. 이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바탕이 되어야 할 세상을 향한 교회의 가르침은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뿌려지고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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