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부터 1999년까지의 20세기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1위는 김수환 추기경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안중근 의사와 지학순 주교, 장면 전 총리 등이 각각 2, 3, 4위 를 차지했으며 「사도법관」 김홍섭 판사가 5위를 차지했다.
가톨릭신문은 역사학자 64명과 각 부문별 전문가 43명을 포함하는 전문가 107인을 대상으로 20세기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한 여론조사를 벌였다. 모두 10명을 뽑는 복수응답을 받은 이 조사결과, 응답해온 전문가 61명 중 58명이 김수환 추기경을 꼽아 1위를 차지했다. 27명이 선정한 서상돈씨가 6위를 차지한 것을 비롯해 류홍렬씨가 7위, 구상 시인이 8위, 뮈텔 주교가 9위, 정지용 시인 등이 그 뒤로 10위를 차지했다.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친 이들의 경우 애초 1차 선정된 50인에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29명으로 반 이상이었으나 전문가를 통해 뽑힌 이들을 보면 예상외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평신도가 7명으로 다수를 차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응답한 이들 대부분이 지난 100년간 우리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김수환 추기경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상징적 인물로 꼽히고 있는 김 추기경은 역사학자와 부문별 전문가들 모두에게 골고루 표를 얻어 다시 한번 그 위상을 짐작케 했다. 또 이번에 뽑힌 성직·수도자 3인 중 2인인 김추기경과 지학순 주교가 교회의 사회 참여를 주도하며 교회의 위상을 높인 이들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두 번째로 많은 수의 전문가가 안중근 의사를 꼽았다는 점도 달라진 인식을 보여준다. 실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교회의 평가가 엇갈려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안 의사에 대한 평가가 활발해지면서 그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확대돼 고른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문화인으로는 각각 21명과 20명의 전문가가 구상 시인과 정지용 시인을 선정해 눈길을 끌었다. 구상 시인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모습도 함께 보였다. 생존 인물 중에서 김 추기경과 구상 시인이 나란히 들어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현직 정치인인 김대중 대통령도 14표를 얻어 그에 대한 평가가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영향력이 큼을 드러내고 있다.
이 외에도 노기남 대주교(19), 이경재 신부(19), 고 제정구 의원(15), 선종완 신부(13),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11), 아동문학가 윤석중(10), 이문근 신부(10) 등 7명이 10표 이상을 얻어 10위권에는 들지 못했으나 한국교회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또 생존인물로 소설가 박경리(6), 이해인 수녀(4), 장발 화백(4), 박노해(1) 시인, 피아니스트 백건우(1) 등 문화계 인물 다수가 꼽혀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이들의 경우 현대에 들어 우리 교회 뿐 아니라 대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친 이들로 문화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 김수환 추기경 - 교회 위상 제고에 큰 공헌
김수환(金壽煥·1922-) : 추기경.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추기경으로 서임. 한국을 대표하는 가톨릭인으로 교회의 위상을 드높였다.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정신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역사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의 상을 제시함으로써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의 사회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로, 교회가 공동선의 추구를 위한 실천과정에서 불의와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안중근 - 독립운동 새 전기 마련
안중근(安重根·1879-1910) : 독립운동가. 의사(義士). 이토오 히로부미를 제거, 독립운동의 새 전기를 마련했다. 1895년 입교한 후 빌렘 신부를 도와 황해도 일대를 전교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운 뒤 연해주로 명명,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의병을 이끌고 국내에 들어와 함경북도에서 싸웠다. 옥중에 있으면서 역사적 현실을 분석한 「동양평화론」등을 저술해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 지학순 주교 - 가톨릭像 사회에 각인
지학순(池學淳·1921-1993) : 주교. 전 원주교구장. 행동하는 교회로서의 가톨릭 상을 사회 곳곳에 깊이 심어 놓았다. 1967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관한 한국 주교단의 공동성명서를 통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출범의 계기를 만들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한국의 사회정의·인권운동에 적극 참여해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정의평화위원회 총재, 한국 교회사회선교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1974년 내란선동과 긴급조치 1,4호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 장면 - 정치통해 교회 정신 구현
장면(張勉·1899-1966) : 정치인. 국정의 최고책임을 맡으며 교회 정신을 구현했다.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1960년에는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선출돼 정치를 통해 가톨릭 정신을 펼쳤다. 1933년에 정지용, 한기근 신부 등과 「가톨릭 청년」을 창간했고, 1936-45년까지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인재양성에 힘썼다. 6·25가 발발하자 기민한 외교적 수완으로 유엔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 김홍섭 - “법복입은 성직자”
김홍섭(金洪燮·1915-1965) : 판사. 일본의 다나까, 중국의 오경웅 등과 함께 동양의 3대 가톨릭 법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자신이 판결한 사형수의 대부가 돼 유가족을 돌봐주는 등 숱한 일화를 남기며 「법복을 입은 성직자」, 「사형수의 아버지」,「사도법관」등으로 불리며 신앙과 양심에 따른 재판으로 존경을 받았다. 인간에 대한 형벌의 궁극적 근거에 대해 고민한 끝에 자신의 독특한 실존적 법사상을 수립해 교회 정신을 펼쳤다. 교회사에도 관심이 많아 치명자산에 이순이 순교비를 세웠다.
■ 서상돈 - 국채보상운동 주도
서상돈(徐相燉·1850-1913) : 대구대교구 초대회장.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했다. 로베르트 신부가 처음으로 대구본당을 개척하자 물심양면으로 도와 대구교구 설정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11년 조선교구가 둘로 나뉘게 되자 남조선교구의 주교 소재지를 대구로 유치하기 위해 운동을 벌여 성공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수만평의 땅을 대구교구에 희사해 신학교, 수녀원 등이 들어서게 했다. 건국훈장을 받았다.
■ 류홍렬 - 평신도 활동 기초 놓아
류홍렬(柳洪烈·1911-1995) : 사학자. 교회사연구가. 교수. 전국평협을 결성해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평신도활동의 기초를 놓았다. 평생 한국사
·천주교회사 연구에 몰두하며 103위 순교자 시성운동에 앞장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서독 뮌헨에서 열린 「국제 동양학자 회의」참가를 계기로 국제 동양학회, 국제 역사학회 등에 진출해 국제무대에서 「한국학 붐」을 일으키고 한국문화를 알리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대한민국 학술원장,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 구상 - 언론·교육 발전에 한몫
구상(具常·1919-) : 시인. 각종시집, 수상집, 수필집 등으로 한국 문단에서 한 영역을 구축했다. 북선매일신문사 기자를 시작으로 연합신문사 문화부장, 영남일보사 주필 겸 편집국장, 경향신문사 논설위원 겸 동경지국장 등을 역임하며 언론발전에 공헌해싿. 또 효성가톨릭대와 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의하며 교육발전에도 일조했다. 신앙에세이 「그릐스도 폴의 강」묵상집 「나자렛 예수」시집 「말씀의 실상」등의 작품을 통해 가톨릭정신을 승화시켜냈다.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상했다.
■ 뮈텔 주교 - 교계제도 확립 토대 마련
뮈텔(Mutel, Gustave Charles Marie·민덕효 閔德孝·1854-1933) : 주교. 제8대 조선교구장. 순교자 현양과 한국천주교회사 정립, 군교복자의 시복 등에 큰 공헌을 했다. 예수성심신학교, 약현성당 등을 준공시킨 것을 비롯해 지방의 본당 창설에 많은 지원을 했다. 확장되는 교세에 따라 교계제도가 확립될 수 있는 기초작업을 벌였다. 1911년 남부지방을 분할하여 대구교구를 설정한 것을 비롯해 20년에는 원산교구가 설정되기도 했다. 일제하에서 교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 정지용 - 일제하 민중의 정신적 지주
▲ 정지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