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성사안에서의 기여
1) 비안네 신부는 수도자가 아닌 교구 사제 즉 본당 주임 신부로서 시성된 첫 사제이다. 교회 역사 안에서 그토록 많은 수도자, 주교, 교황들이 시성 되었는데 왜 재속(교구) 사제 혹은 본당 사제들이 시성 되지 못했을까? 교구 사제들이 그만큼 거룩하게 살지 못해서였을까? 그것은 영성의 다양성과 성성에의 보편적 소명에 대한 인식부족과 성성을 재는 규준의 역사적 한계성 때문이 었을 것이다. 교회 역사 안에서 오랜 동안 성인의 특성(聖性) 이란 종말적 상황 안에서 소수의 예외적 인물이 실천할 수 있는 엄격한 수덕 행위와 연계되어 이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성은 순교자들이나 종말 영성을 사는 관상 수덕자들에게 가능한 특전처럼 제한적으로 이해되면서 세상사에 관여하는 평신도나 교구 사제의 생활 방식에서 성인의 길 추구란 어려운 것이라 여겨졌다. 교구 사제들의 고유한 영성과 완덕관이 제시될 수 없었기에 적절한 성성의 척도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성에 불렸다는 「성성에의 보편적 소명」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기 신분과 생활 상태에 따라 고유한 방법으로 은총과 협력하여 성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거룩하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의 목표는 하나이고 모두에게 공통적이지만 거기에 나아가는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성소에 따라 생활의 모습이 다양하므로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표현도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성사를 생활화 하는데 공통적 요소를 지니지만 신분과 생활의 양태에 따라 완덕에 나아가는 방법엔 고유성을 지닌다. 이를테면 수도자가 철저한 복음 권고덕을 살면서 성화된다면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 성화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한편 사제는 백성들을 가르치고 성화시키며 헌신적으로 봉사하면서 성화되는 것이다.
비안네 신부가 성인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엄격한 수덕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 실제로 그는 금식, 수면 단축, 청빈, 절제 등 엄격한 수덕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성인 되게 한 것이 아니다. 교회 생활 안에서 때론 고행을 성성과 동일시되면서 고행적 수덕이 비인간적일 만큼 엄격할 수록 완덕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으로 잘 못 생각하기도 하였다. 수덕은 성성이나 완덕에 나아가는 생활의 기초이고 방편이긴 하지만 성성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인간 안에 활동 하시도록 준비하는 자세이며 또한 그분의 효율적 도구가 되기 위한 훈련이다. 그러나 성성은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받는 은총인 것이다. 비안네가 성인인 이유는 무엇 보다 본당신부로서 성실히 살며 사랑으로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가르친 대로 그는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사제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인 신자들을 일생 동안 온 몸을 바쳐 사랑하고 봉사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상이며 목표인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일상생활 이나 그 과제에서 떠난 특수한 수덕생활 방식에 있다고 제한적 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인이 되는 지름길은 비안네가 그러했 듯이 자신의 소명 안에서 자기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맡은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그러했듯이 오늘도 잘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훌륭한 성인으로 살며 봉사하고 있는 본당사제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2) 비안네 신부는 고해사제 및 영적 지도자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귀감이다. 비안네 신부가 훌륭한 사제 및 영적 지도자로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 카리스마도 타고났지만 기도와 훈련을 통한 은총의 결실로서 필요한 덕과 맑은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그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데 요청되는 통찰력과 식별력, 적절한 훈계를 위한 말씀, 용기와 위로를 북돋아 주는 내적 치유력 등 카리스마들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가 부성애를 지닌 고해 사제 및 영적 지도자가 되기까지엔 은총에 협력하면서 사랑, 인내, 자비로움의 덕을 갖추어야 하는 성숙의 시간이 요청되었다.
사목 생활 중 초반기엔 그가 얀세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의문이 제기될 만큼 고해자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그는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차차 엄격함에서 벗어나 용서와 자비의 봉사자로 변화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 내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인내 그리고 사랑을 점점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매일 찾아오는 사람들의 고뇌와 죄 고백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인간 실존의 한계성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주변의 현명한 조언을 겸손되이 받아 들였으며 무엇보다 기도와 묵상, 성체 조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가까이 나아 갈 수 있는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표현할 만큼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선량하신 하느님께서 제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당신께 큰 기쁨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물에 빠진 자기 아기를 구해내는 것보다 더 빠르게 선량하신 하느님께서 뉘우치는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3) 비안네 신부는 생활한 신학을 일생동안 끊임없이 공부한 사제였다. 가끔 비안네는 학문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열심한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마치 지성적 측면이 영성적 측면에 있어 성장하는 데 방해하거나 지장을 주는 것처럼 잘 못 생각하는 것이다. 사제 양성과 지속적 교육 과정에서 지적 교육은 인성 및 영성 교육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교육 들이 잘 이루어지는 데 필요하다. 실로 지적 교육과 영성생활은 연결되어 서로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것이지 결코 서로간에 장애가 되면서 학문 연구의 견실함을 떨어뜨리거나 기도의 영성적인 풍미를 잃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신앙을 체계화한다. 한 측면은 하느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은 하느님과 대화 하는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비안네는 그와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신학을 조화 있게 공부한 사제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 시대적 사회 불안과 가정 형편상 기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소신학교 및 대신학교 과정을 제대로 이수할 수 없었지만 학교 당국의 배려로 발레 신부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으며 부족하긴 했지만 필수적인 신학 과목들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사제성품 후 일생동안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면서 공부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철저히 검소했던 그가 아르스 본당에 부임할 때 스승 신부로부터 물려받은 300 여권의 책만은 모두 챙겨 올 만큼 독서와 공부를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한편 그의 참된 신학 공부는 사목 생활의 체험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기도 중에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그분으로부터 직접 배웠으며 그분의 모상을 지닌 인간들과의 만남 중에 배운 것이다. 그의 참된 공부의 강좌와 교재는 기도와 미사, 성체 조배였고, 그 보조 교재는 그가 만나고 봉사한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기에 사람은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성서와 함께 주요한 원천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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