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말 통계로 380만의 신자와 1000개가 넘는 본당을 가진 현대의 한국교회. 왕성한 활력이 넘치는 희망찬 교회로 인정받고 있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신자로서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장 그 이면에는 성장위주의 과정 속에서 간과해 왔던 교회의 사명들이 숨겨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00년 희망의 새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한국교회는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해답의 열쇠는 역사에 있다. 한국교회가 창설되고 발전 해오는 과정 속에 앞으로 나아갈 길이 숨어 있다는 점에서 1900년대를 마무리 짓는 오늘 우리 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국교회의 창설
한국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자생교회라는 점에 있다. 한국천주교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창설되기까지에는 여러 배경이 있는데 그 첫번째가 천주교의 동양선교와 한역 천주교 서적의 전래이다.
동양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16세기말엽부터 마테오 릿치 신부의 천주실의 등 중국 선교사들이 지은 책들이 국내에 들어와 천주교를 알게됐다.
또한 조선왕조의 정치와 사상의 근간을 이루던 성리학이 18세기를 전후해 퇴조하면서 일부 지식 층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찾게됐고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고 농은 홍유한과 같은 이는 스스로 수계생활을 하기도 했다.
과학적인 측면에서 서교를 연구하던 실학자 중 특히 이벽과 권철신 같은 이들은 주어사에서 강학을 열 정도로 나름대로 교리를 연구하고 계명을 실천하며 살았고 이벽의 부탁을 받은 이승훈이 1784년 중국 북당성당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기에 이른다. 귀국한 이승훈으로부터 1784년 음력 9월 서울 수표동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 등이 세례를 받고 모임을 가지면서 한국교회가 창설된다.
이는 이 땅에 천주교가 알려진지 200여년만의 일이다. 당시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겠다는 의미로 이승훈이 베드로, 한국교회의 창설을 시작하고 준비해온 이벽이 세례자 요한, 권일신이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주보로 모신 것은 교회가 창설되기까지 200년 그리고 교회 창설 후 200년을 지나 뒤돌아 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해시기와 교구설정
그러나 한국교회는 창설 직후부터 탄압에 직면하게돼 1785년 첫박해인 을사박해로 김범우가 귀양 중 고문후유증으로 순교하게된다. 김범우의 순교와 이벽의 은거로 이승훈을 비롯한 교회지도자들은 교회발전책의 하나로 가성직제도를 도입 2년간 각종 성사를 집행한다. 그러나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 후 잘못된 것임을 알고 즉각 중단한 채 이때부터 선교사 영입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세계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가성직제도는 미사를 비롯한 성사가 얼마나 중요하며 선조들이 한명의 사제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왔는지를 짐작케하는 사건이다.
윤유일을 밀사로 1789년부터 북경교회를 통한 선교사 영입운동을 하던 조선교회는 우여곡절 끝에 1794년 12월 24일 드디어 중국 소주 출신의 주문모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첫 선교사를 맞게되고 1795년 부활대축일에 교회창설 후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게된다. 주신부 도착 당시 4000명이던 신자가 1만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하던 한국교회는 정조 승하 후 일어난 1801년 신유대박해로 주신부를 비롯해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황사영 등 모든 평신도 지도자들이 희생됨으로써 거의 황폐화 됐다. 그러나 박해는 박해를 피해 각처로 흩어진 신자들에 의해 신앙을 더욱 널리 전파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주문모 신부 순교 후 5년간 성직자없이 지내면서 교회재건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한국교회는 정하상을 중심으로 성직자 영입을 가장 우선과제로 삼고 1811년부터 교황청에 선교사 파견을 꾸준히 요청하고 있었다. 1827년에서야 조선교회의 선교사 파견 청원서를 받아본 교황은 조선포교를 맡아줄 수도회를 물색하다 한국교회의 신앙에 감동한 파리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교사를 자청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1831년 9월 9일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조선교구장에 임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하지만 1836년이후 모방신부를 비롯한 조선포교를 책임진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입국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년에는 신유박해에 이은 두번째 대박해가 일어나 엥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들이 순교하고 정하상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기해년 대박해로 조선정부는 선교사와 우수한 지도층 신자들이 처형된 만큼 천주교가 사라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조선교구 설정과 함께 파리외방전교회가 선교사 파견을 보장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성당에서 김대건 부제가 사제로 서품돼 첫 한국인 성직자가 탄생한다. 한국인 사제의 탄생으로 고무돼 있던 조선교회의 기쁨도 잠시, 선교사들의 해상입국로를 마련하던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체포돼 처형당함으로써 조선교회는 또 한번의 시련을 겪게된다.
김대건 신부 순교 후 국지적인 박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신자들의 전교활동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둬 교회 재건의 기틀을 이루던 중 1866년부터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된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다시 베르뇌 주교와 남종삼 등 주요인물이 순교하는 형극의 길을 걷게된다.
박해시기 중 1839년과 1846년 박해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등 79위는 1925년에, 1866년에 순교한 24위는 1968년에 시복돼으며 1984년 5월 6일 시성됐다.
개화기와 일제시대
19세기 후반부터 1910년까지의 시기에 조선은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는데 중국중심의 국제 질서에서 근대적 국제질서로 변모하는 가운데 쇄국정치를 끝내면서 1882년 미국과 1886년 프랑스와 조약을 맺으면서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이로써 교회는 병인박해 이후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던 단계를 거쳐 1895년 정부가 병인박해때 순교한 일부신자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공인받게 된다. 그래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나름대로 교육, 언론, 사회복지 활동 등을 통해 근대화에 기여하게 된다. 특히 선교활동의 중심역할을 하게될 본당 조직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결과 신자수는 1910년에 7만을 헤아리게 됐다. 한편 이 시기는 선교사들의 문화우월적 태도와 강압적 선교방식으로 지역사회와 갈등을 빚어 1901년 제주에서 신축교안과 같은 각종 교안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제시대 동안 교회는 일제의 수많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구와 본당 등 교회 조직면에서는 현저한 발전을 보였다. 조선교구 하나 뿐이던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에 무려 6개 교구가 증설되는데 1911년 대구교구의 분할 설정을 시작으로 원산, 평양, 연길, 전주, 광주, 춘천 등이 잇달아 독립했다. 교구의 증설은 많은 일꾼을 필요로해 여러 선교 단체가 한국에 진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영성이 다양화되는 계기가 됐고 한국인 성직자 또한 크게 증가해 1910년 15명이던 한국인 사제가 1944년에 이르러서는 132명으로 늘어났고 1942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노기남 주교가 탄생한다. 그러나 신자수의 연평균 증가율은 크게 감소해 개화기의 증가율 6,98%에 크게 못미치는 인구의 자연 증가율에 불과한 2% 수준으로 격감했다.
이는 지난 수세기간 박해를 경험한 교회가 일제하에서 교회보호우선정책을 추진해 정교분리원칙, 선교우선주의를 내세워 독립의 문제를 정치문제로 단정하고 민족운동을 백안시한 교회 당국자들의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8.15해방과 200주년
한국 현대사의 기점이 된 1945년 8.15해방을 감격적으로 맞은 한국교회는 1946년 경향잡지 1949년 천주교회보 속간 등을 통해 선교를 위한 전열을 재정비해가며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권에 기반하여 「대한천주교연맹」(1949)을 결성하는 등 가톨릭운동 전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분단이 심화되어가던 북한에서는 혹심한 탄압이 가해져 거의 모든 성직자들이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고 1950년 6.25 동란으로 말미암아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한편 6.25 직후부터 한국교회는 외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전재민 구호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1950년대 평균 16.5%라는 높은 신자 증가율을 기록하게 된다. 이러한 격동기 속에서 한국교회는 1962년 3월 10일 드디어 3관구 11개 교구의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돼 전교지 교회에서 세계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교계제도의 설정은 1966년 주교회의 정식 조직 1968년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창설 등 제도적 발전을 이룬다. 그러나 60년대의 신자 증가율이 6.2% 70년대에는 5.2%로 줄어 선교정책의 일대 전환이 요구됨을 반영해주고 있었다.
이에 한국교회는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독재에 맞서 싸우며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인권운동 등으로 사회의 지지를 얻게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교회는 민족과 사회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다.
단순한 구호활동에서 사회개발의 방향으로 교회활동을 전환한 한국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서도 7.54%라는 높은 신자 증가율을 유지할수 있었고 그리하여 1981년 140만이던 신자수가 1986년 200만명 1992년에 300만을 넘어섰다. 또한 한국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 북한선교와 해외선교에도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해 세계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선교책임을 다하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교회는 대규모 종교집회를 통해 한국교회의 저력을 확인하고 새로운 쇄신의 길을 모색하게된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필두로 1984년 200주년 기념행사와 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잇달아 개최해 성장한 한국교회의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200주년 행사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방한하여 그 의의를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이 거행돼 전세계의 존경을 받게 됐다.
90년대 들어 한국교회는 한때 팽배했던 자족감에서 벗어나 1992년 사할린에 선교사제 파견,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 설치로 대북지원 본격화 등 아시아 복음화의 주역으로 새로운 교회상을 정립하는 한편 내적 복음화를 강조하며 끊임없이 새로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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