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조차 힘들다. 뼈속 깊숙이 파고드는 이 살인적인 추위에 사지가 점점 굳어지고 있다. 굶주림과 추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 그냥 이대로 끝내고 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 어린 것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살아서 강을 건너야 한다. 중국으로 건너가면 우리 모자( 母子) 여기서처럼 비참하게 굶어죽지는 않겠지? 갑자기 눈물이 난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 이 닥쳐야하는 것인지?…』(중국으로 탈북한 어느 북한여성의 탈출기 중에서) 김순임(30·가명)씨.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그는 지난해 5월 탈북했다. 청진에서 어업하던 남편과 다섯살배기 아들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했던 김씨. 넉넉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굶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았다.
그런 그에게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 건 지난해 4월 회령 친정집을 방문하면서. 김씨의 친동생 이 당국으로부터 감시를 받아왔고, 급기야 체포가 임박하다는 얘기를 전해듣게 됐다. 북한에서 사상적으로 의심받아 체포되면 곧 그 가정의 몰락을 의미하므로 김씨는 가족을 살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친정 어머니가 「중국에 가면 잘 살 수 있다」고 제안했고, 김씨는 동생과 가족이 중국에서 기거할 임시 거처라도 마련해주기 위해 잠시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그는 친정 어머니가 우연히 알게된 중국 무역상 남자를 따라 연길 쪽으로 탈북했다. 어떻게해 서든 가족들의 몰락을 막아보자는 생각에 김씨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이 남자를 따라나선 것이다. 하지만 부푼 희망을 안고 어렵사리 건너간 그곳에는 무시무시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인신매매. 믿고 따라갔던 그 남자가 북한지역의 인신매매를 담당하던 행동책이었던 것이다. 아 무것도 모르고 있던 김씨는 이미 대기해있던 낯선 사람들에 이끌려 어느 조선족 남자에게 중국돈 3000원에 팔려가고 말았다. 동생과 가족들을 살려보겠다고 발벗고 나섰던 그에게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악몽같은 세월을 받아들여야 했다. 끔찍한 폭력과 협박 그리고 성관계 요구. 자전거 인력거로 생활하던 이 남자는 매일 술타령에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김씨를 구타했다. 심지어 그 를 발가벗겨 놓고 채찍으로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때리며 변태적인 성관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짓을 김씨에게 저질렀던 것이다. 불법체류자라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 없어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김순임씨.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두고온 사랑하던 남편 과 아들 볼 면목이 없어 죽을 결심을 한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심하게 매질 당한 어느날은 이 남자를 죽이고 도망칠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낯선 땅과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쉽게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연명하던 중 그는 자신말고도 상황이 비슷한 동포 여자들이 굉장히 많다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알게된 한 북한여성도 자신처럼 무참하게 짓밟히며 어쩔 수 없이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여자로부터 그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도 전해들었다. 3살난 딸을 들쳐업고 굶주림 때문에 북한을 탈출했던 한 여성이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혀 중국인에게 팔려갔다. 그런데 이 남자가 여자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애기를 여자가 지켜보는데서 강물에 던져 죽였던 것이다. 이 얘기를 듣고 김씨는 가슴에 치미는 분노와 울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던 어느날. 김씨는 그날도 그 남자에게 심한 매질과 유린을 당하고 새벽녘에 탈출을 시도해 드디어 생지옥 같았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 때문에 지금도 고통받을 남편과 자식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죄인이 됐어요. 제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 그리고 가족 들을 다시 한번 보는겁니다』
90년대 이후 급증한 탈북자들. 한 민간단체 조사에 의하면 99년 현재 중국을 떠도는 탈북자의 수가 무려 30만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이 겪는 인권유린의 실태 또한 여성· 남성·아동할 것 없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전체 재중 탈북자의 약 70퍼센트 이상을 차지 하고 있는 여성탈북자들에게 가장 심각한 인권유린의 문제는 인신매매로 대변될 수 있는 매매혼 이다. 탈북여성들은 배고픔의 해결과 생존을 위해 많은 경우 한족 및 조선족과 매매혼을 매개로 강제적 결혼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법적으로 그들의 신분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비참한 성의 노리개로 전락해 폭행과 매매춘의 강요까지 당하며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13살난 아들과 탈북해온 이복순(37·가명)씨. 배고픔을 참지 못해 자식과 탈출한 경우다. 북한 에서도 상당히 빈민층에 속했던 이들 모자(母子)는 식량배급을 받지 못해 산, 들을 쫓아 다니며 나무 껍질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만 했다. 남편은 몇년 전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그만 운명을 달리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 억울하게 죽은 남편은 둘째치고라도 사랑하는 하나 뿐인 핏줄마저 이렇게 비참하게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씨는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영하 25도를 넘나드는 추위와 굶주림. 이들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며 몇일을 야심한 밤에만 산으로 이동하 면서 무사히 두만강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는 도중에도 몇번이나 군인들에게 발각될 뻔 했지만 기적적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산에서 나무껍질이며 열매를 보이는 대로 먹었습니다. 중국에서 거지를 하더라도 여기보다는 나을거라 생각한 거죠. 정말 배고픔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무사히 강을 건너 도착한 중국땅. 「이젠 굶어죽지 않겠구나」란 생각에 모자는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씨는 인근의 한 가옥에 들어가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들은 이들 모자를 안심시키고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돌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씨는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라 안심하고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이내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잠시 후 낯선 사람들에 의해 이씨는 아들과 생이별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길로 그는 어느 중국인 남자에게 팔려갔고, 지금까지도 자식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다. 오십쯤 되는 남자에게 팔려간 이씨는 성의 노리개로 전락해 밤마다 치욕스러운 일을 당해야 했다. 심지어 이 남자는 자신의 친구에게 이씨를 하룻밤 노리개로 제공 하는 짐승같은 짓을 서슴치 않았다.
추위과 굶주림속에서도 죽을 수 없었기에 찾아온 중국.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죽음보다 못한 절망감 속에서도 이씨는 자식을 찾아야겠다는 의지만으로 이 생활을 버텨나갈 수 있었다. 『혹시 굶어죽거나 얼어죽지는 않았을까?』매일 매일 이런 불안감 때문에 그는 하루빨리 이곳을 탈출해 아들을 찾아야겠다고 기회를 엿보았다. 그후 몇번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하루 종일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맞기도 했다. 결국 이씨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아들 찾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아이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살기 위해서 함께 왔는데 어린 것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평생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겼어요』 새로운 희망을 머금고 중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들의 행렬. 이들은 정당한 난민으로 인정되지 못한 채 언제든지 중국공안에 체포될 수 있고, 체포 시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부당한 대우에도 항변 한번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 송환 시 많은 경우 처형이나 장기간의 고통스런 강제 노역을 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들의 도피행태는 가히 필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2천년 대희년을 맞은 기쁨과 설레임에 들뜬 세계 모든 교회 구성원들. 세계의 일치와 화합을 기원하는 드높은 목소리가 온 세계로 메아리 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과 은총의 대희년을 맞은 지금도 우리 동포들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중국으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할 수 밖에 없다. 중국 연길에서 만난 어느 꽃제비의 절규어린 목소리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친구들이 어느날 보이지 않으면 굶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 지긋지긋한 배고픔이 없고 실컷 먹을 수 있는 나라였으면 좋겠어요』 ※도움주실분=한빛은행 702-04-107874 (예금주 가톨릭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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