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마지막 해인 2000년 대희년에 즈음하여 선교 3세기에 들어선 한국 가톨릭 교회의 성숙한 신앙생활을 염원하면서 몇 가지 사항을 참고 삼아 지적하고자 한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지금 약 200년 동안의 박해와 억압을 피와 땀으로 극복하고, 여러가지 내적 갈등과 방황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확장되고 사도직 단체와 신심운동이 활발히 전개 되고 있다는 것은 세인이 다 인정하는 바이다. 이러한 외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점증하는 냉담자의 수와 성사생활의 감퇴현상과 기복신앙의 절충주의적 발로는 우려할만 한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교회의 내적 진보와 외적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하여 대희년은 우리에게 좋은 기회와 계가를 제공한다. 희년의 전통적 의미대로 화해와 용서와 탕감의 실천을 통하여 원상복구를 도모하려면 현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울러 미래를 위한 재출발의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라도 그것이 제도화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인간들의 손때가 묻게 마련이고, 이런 것이 누적되면 사이비 전통으로 오인되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한국 교회도 전래 초기 박해시대의 신앙선조들은 진리와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하여 모호한 타협이나 절충을 단호히 거부하였건만, 오늘을 사는 후손들인 우리들 중의 일부 사람들은 너무 쉽게 안일과 나태와 체면과 반대와 타협하는 신앙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가톨릭 신자로 자처하면서도 현실적 이익을 위하여 미신과 타협하고서도 부득이한 일이라고 자위하는 신자도 비일비재하다. 입학시기에는 많은 신자들이 팔공산 갓바위를 찾는다. 신자 업주가 개업을 하면서 종업원들을 핑계삼아 돼지머리 고사를 지낸다. 본당 미사의 강론이 시원찮다고 예배당에 설교 들으러 간다. 여호아의 증인의 인력 공급처는 어설픈 가톨릭 신자 들이다. 교적상 신자 총수의 1/3이 냉담자 내지 행방불명자이다. 평균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샤머니즘(무당숭배)이나 애니미즘(정령숭배)이나 토테미즘(물신숭배)의 잔재를 버리지 못한 신자들도 부지기수이다.
이러한 비관적인 관찰만이 한국 교회의 실상을 다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면도 많이 있다. 한국 교회는 그래도 선교가 가능하고 실제로 신자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애덕실천에 있어서나 사회참여에 있어서나 가톨릭 액션이나 신심운동에 열성적인 신자들도 많이 있다. 하향추세이지만 아직 성직성소, 수도성소가 꾸준히 계속되고 있으며, 간접선교 기관인 교육, 의료, 자선사업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소극적 적극적 관찰을 전제로 하면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추구하기 위하여 교회가 35년전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반포한 헌장과 교령의 쇄신작업의 바탕이었던 「복음에로 돌아가자」는 정신을 재차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에로 돌아가서 보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우리 신앙의 출발점도 그리스도이시고 종착점도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 셨다』(요한 3, 16). 하느님과의 이러한 친교에 들어가는 길은 신앙이고(요한 11, 25~27)이 신앙의 내용은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한 17, 3).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고 하셨다.
본래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창세 1, 27) 인간이지만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범죄하여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친교가 단절된 것을 예수께서 하느님의 인간구원의 계획에 따라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이 친교를 회복하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은 천주성자로서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탄생하시어 인간성을 현양하고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주신데에서 시작된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의 설교는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관계(하느님 나라)를 설파하고 있으며, 그분의 기적들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능력이 현세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그분의 전생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루시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수난하여 죽으심으로서 인간의 죄악을 대속하시고 하느님의 진노를 거두게 하였다. 죽음에 이르는 철저한 순종으로 인간의 모반을 보상하시어 인간을 하느님께 화해시키셨다. 그분의 부활은 죄악과 죽음에 대한 인간성의 승리를 의미하고, 인간도 영성화한 육신으로 부활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가능성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렇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빠스카 신비)에 참여한 인간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은총을 주셨다. 성령께서는 신자 각자에게 생명의 은총을 주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를 연장하고 있는 교회 안에 상주하시어 교회가 구원의 진리를 믿고 가르치는 사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카리스마(은사)를 주신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성령의 강림은 구속신비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간이 창조된 모습을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하느님께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사도 바울로는 구속을 「새로운 창조」(에페 4, 25 골로 3, 10 2고린 5, 17)라 하였다. 첫째 창조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었으나 새로운 창조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신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인간적 차원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그리스도의 신비에서 연역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정체성을 인식한다.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서 창조되고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으로 구원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인간의 고귀한 품위를 밝혀주는 것이 기쁜 소식이고 이 복음을 인간생활 안에 구현시키는 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래서 희랍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의 내용과 목적을 서슴없이 인간의 신화(神化)라 하였다. 라틴 교부들은 범신론의 위험을 경계하느라고 직접 신화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인간의 그리스도화가 그리스도교의 내용이요 목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그리스도화를 추구하는 그리스도교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인본주의(Humanism)이다. 비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들은 인간 조건의 어떤 면을 설명할 따름이지 인간조건의 기본인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파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에 의하면, 인간의 삶을 하느님의 모상을 제대로 발휘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현양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도모하는 것이고, 인간의 죽음은 인간조건의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과의 일치에 나아가는 관문인 것이다. 달리 말해서 현세의 삶은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지만 허무한 것도 아니고 무의미한 것도 아니며, 현세의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나 멸망이 아니고 영생에로 넘어가는 재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의 신비는 비단 후세의 영생을 갈망하거나 약속하는 원리만이 아니고, 이승의 삶의 여러 마디에 대해서도 확고한 가치를 인정하고 그 의미를 해석해준다.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추구하면서도 현세의 인간사(人間事)에 관여하는 이유는 인생의 이승과 저승을 완전히 분리하는 이원론(Dualism)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이승이나 저승도 인간의 몫이요 영혼 육신을 갖춘 인간은 하느님의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신비는 인간의 신비를 통찰하고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은 성자를 구세주로 파견하셨고, 구세주는 당신의 빠스카 신비로써 인간을 구원하셨고, 후대의 인간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인간조건에 맞는 가시적인 교회 공동체를 남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체성은 이 공동체의 이념이나 조직이나 계율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에서 찾아야 한다. 신약의 교회 공동체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위상과 사명을 계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소집되고 혁신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구원은총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그 안에 성령께서 상주하시면서 생활케 하시는 성령의 궁전이다. 교회헌장은 교회의 정체성을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의 신비체, 성령의 궁전이라고 표현하였다. (교회헌장, 1장, 2장). 그러므로 교회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연장이요, 영상이 라고 보아야한다.
현세 교회의 가시적인 조직과 제도와 인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봉사하는 도구들이다. 따라서 오늘도 가시적인 교회라는 공동체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구세주께서 교회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인간을 구원하고 계신다.
요한 제1서간은 복음선포의 목적을 분명히 말한다. 좬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좭(1요한 1,2~3).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준 베드로 사도는 유다인 지도자들에게 말했다. 좬이 예수는 집 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사도 4,11~12)좭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예수라는 이름 외에 그 어떠한 위대한 성인이나 천사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기초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는 교회가 오랜 역사과정에서 인간구원에 도움이 되고 참고가 될 수 있는 많은 제도와 수단을 설정하고 개혁하고 권장해 오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구원의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대희년에 한국 교회와 신자들은 다시 한번 그리스도 중심주의적 신앙생활을 깊이 천착하고 실천 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신자들의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집중되지 않고 주변사항들에 흩어져 있으며, 사목자들까지 여러 가지 보조수단이나 주변사항들로 신자들을 들볶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이런 견해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이 증명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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