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반성하고 이 희년에 이루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새 천년을 맞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점을 말하고자 한다. 특히 평신도 스스로 자신을 병신도(病身徒)라고 여기는 잘못된 인식을 가졌다면 다같이 자각하여 자기자리를 찾아야 한다. 행여 성직자가 평신도를 병신도로 잘못 여긴 점이 있었다면 마음을 고쳐 건강한 신도가 되도록 평신도를 도와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항상 도와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그러나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나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 이는 마치 농부가 먼저 씨를 뿌리지 않으면 추수를 기대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준비를 위하여 신자 개인으로서, 그리고 신자공동체 안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름대로는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 개인은 물론 신자공동체가 알게 모르게 영혼의 호흡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수가 새로 교회를 찾는 수를 능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사회지도자로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성직자, 평신도 단체나 개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더욱 피폐일로를 걷고 있다는 지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정신
교회는 계속하여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지속해왔다. 특히 대희년을 통해 우리들에게 체험하게 하신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미 1964년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오늘의 대희년 준비를 위한 구체적 논의의 시작이라고 미루어 짐작이 된다. 교회내의 쇄신, 타종파와의 화해 등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 후 50여 성상이 지난 오늘까지 교회에 그 정신이 신도들의 생활 속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다. 다만 제대의 위치가 바뀌고 성당의 외모에 변화만 있을 뿐, 그리고 한국교회가 1967년 평신도의 날을 정하여 지극히 형식적으로 지내오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4차 전체공개회의 석상에서 당시 교황 바오로 6세께서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공포하신 후 그 전문을 평신도 방청인 3명에게 건네준 사건 이후 세계 의 평신도는 가슴이 부풀었고 그에 따른 사명과 기능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후 1987년 10월 로마에서 개최된 제7차 세계주교시노드의 주제가 「2차 바티칸공의회 20년 이후의 교회와 세계 안에서의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후 제3차 세계평신도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 무성한 논의들이 일선 지역 교회에 무슨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가?
신도의 의미와 사명
어느 신부님의 말씀대로 무성한 말잔치로 끝을 맺을 셈인가하는 아쉬움 때문에 가슴이 답답 하기만 하다. 지상의 교회를 구성하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신도(信徒)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신도의 본래 의미를 바로 알고 실제 신자공동체 속에서 그 구실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같은 신도(Laikos)이다.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1베드로 2,9) 신자로서 특별한 직분을 가진 즉 성직자와 신자 수도자는 모두 교회의 적극적 책임있는 멤버이다. 모든 이가 영적 존재이다. 교회란 우리 모두를 말한다. 따라서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 인은 교회에 위탁된 유일한 구원사업에 참여한다. (聖事가 되는 것, 세상구원을 위한 표지와 도구) 즉 교회의 건설과 교회의 사명에 협력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아쉬운 점은 고대의 어법에서 설명하는 「Laos=民」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신 도(信徒)의 개념이 오늘 교회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신도(信徒=Laie)는 사정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 전문가가 아닌 사람, 프로가 아닌 자라고 이해한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어떤 事情) 것인가가 분명하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 교회와 그 공동체는 처음부터 하나의 몸, 즉 각 지체가 전체에 대하여 공유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한 몸인 것이다(고린토 전 12, 14-31). 가톨릭 교회는 위에서의 성직자의 교회도 아니며 밑에서의 신도의 교회도 아니다. 그것은 조 직화된 서로 구별되는 전체이며 살아있는 친교현실(親交現實)이다. 각자는 나름대로의 카리 스마와 달란트를 받았다. 만약 평신도의 아들인 성직자만이 교회의 주인이다라고 여기는 평신도가 있다면 그 는 교회에 대한 인식을 잘못한 것이다.
교회헌장(제31장)과 평신도 교령(2항)에서 강조하는 것이 세속 안에서 살며 세속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 평신도의 고유 모습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교회 안의 일은 성직자가, 교회 밖의 일은 평신도가 맡은다고 할 때 예를 들어 교회에서 펼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업(학교, 병원, 구호사업, 언론 등등)은 교회 안이냐 세속적인 것이냐의 개념 규정이 모호하다.
앞서 지적한 신도(Laie)의 개념 중 성직자·수도자는 전문가며 프로이고 평신도는 그것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경우 혼란이 온다. 이런 점에서 성직자가 아닌 신도(평신도)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기 쉽다. 교회는 조직화된 서로 구별되는 전체라는 점을 바로 인식하고 주인으로서의 구실을 자기가 속한 곳에서 적극적으로 해야한다.
대다수의 신도들은 단순한 민중이 되고 성직자는 유력한 지배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카리스마와 권력이 불행한 형식으로 혼돈되었던 옛날 역사의 교훈을 교회 구성원 모두는 성찰해야 한다.
영적 성숙 노력의 의무
특히 평신자들은 바른 신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계속적인 탐구와 영성적 성숙을 위한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현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성직자만을 통하여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침투 하기는 매우 힘들게 되었다. 그분들의 활동은 상당히 제한을 받게 되었으므로 훌륭한 평신도들의 출현이 대단히 시급하다.
세상의 일들(노동, 직업, 정치, 경제, 학문, 문화, 스포츠, 보도, 학교, 병원)은 창조질서에 의거하여 그 나름의 고유한 법칙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법칙성을 그리스도교적으로 관철하고자 하면 이 문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세상의 일에 있어서 신도(평신도)는 전문가이며 이에 반해 성직자는 문외한이다(물론 예외는 있다)라고 하는 견해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신앙의 타성화된 입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이해하려는데 대한 바른 비판인 것이다.
따라서 평신도는 주체정립을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 신자들이 사목적 배려의 대상으로서의 취급에서나 성직계급의 자유로운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평신도의 봉사는 구원의 봉사
세상 안에 있는 평신도의 봉사는 완전히 세속적 봉사가 아니라 구원 봉사이며 동시에 교회를 위 한 봉사라는 것을 같이 명심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교와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며 동시에 사회에 그리스도의 육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세상 봉사는 교회의 특성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이 보이는 표지로서 한 몫을 차지한다.
평신도는 교회와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가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 그 자체이다. 평신도는 단지 교계제도를 돕기 위한 보조자도 아니고 사제 부족에 대한 상대적 대체물도 아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의 중요한 자문 및 의사 결정 기구에 그곳에 걸맞는 전문가인 평신도의 참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톨릭 신앙연구소의 조사(1998년)에 따르면 본당 사목협의회의 역할 중 응답자의 절반이 사제와 평신자와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으나 또다른 지도자급 평신도들에서 모은 설문에 의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구현을 주장하면서 『기도하는 성직자 수도자의 모습을 보고싶다』 『언행이 일치하는 사제가 더 많이 있었으면 좋 겠다』 『교회가 왜 실천하지 못하면서 사회에 대하여 주장만 하는가? 교회 종사자의 후생, 복지, 임금』 등등. 그외에 『성직자의 독선적 태도나 사제의 권위를 구분했으면 좋겠다』하는 내 용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성직자는 교회를 신·개축하는데 쏟은 노력보다 사제 수도자로서의 성숙된 영성을 통해 신도에게 열성적인 감화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비교하기가 민망스럽지만 공자의 정치철학 세가지(국방, 경제, 신뢰)중 최후의 보루, 제일 중요한 것이 「신뢰」라고 한 것이나 신자공동체서는 무엇보다 영성적으로 성숙된 신자들이 많아야 된다는 것과 맥이 통한다. 늘 우리들의 삶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이 그들이 모인 공동체 속에서 자란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삶과 가족 공동체 속에서 문제 발생의 요인(사도적 삶의 장애요인)을 줄여 나가는 슬기가 필요하다. 자신이나 세상의 죄악을 슬퍼하고 현재의 잘못된 생활을 개선할 것을 결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과 죽음을 겪을 각오를 할 때 비로소 풍성한 은혜를 얻게 된다.
몇가지 제안
먼저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보면, 첫째 모든 문제는 예방할 수 있다. 만약 장애 요인이 있다하 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루가 21, 36)』라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실천하자. 둘째, 기도를 하되 겸손하게 신뢰심을 가지고 참을성 있게 꾸준히 해야 한다. 구령에 도움이 되는 것을 우선적으 로 할 것이다.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코 11,24)』. 셋째, 하루를 시작하는 첫시간 기도로 시작하고 1년 365 일 하느님과 같이 걸으며 (미사 참례가 어려우면 그날의 복음만 읽고) 잠깐이라도 묵상하자. 넷째,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기회)을 될 수만 있다면 많이 늘리면서 가족 공동기도를 하도록 노력한다. 예수님께서 12사도들을 모아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장면을 묵상해 보자. 가족이 모인 식탁이 은혜롭고 성스러운 곳, 주님의 잔치상이다.
다음으로 교회 공동체 속에서 작은 것부터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사 참례시 앞자리부터 앉기, 구두소리를 내지 않기, 미사가 끝난 뒤 서로 안부를 묻는 자상함을 보이자. 신자 공동체 속에서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헐뜯지 말자 등등.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친교의 교회 실현
21세기는 보다 투철한 윤리의식을 갖는 사람, 인간은 존중하고 창의력이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신도는 여기에다 그리스도인 정신을 첨가하며 사는 삶을 살자. 신도들에 의하여 만들어 가는 집은 성령의 도유로 축성되어 영적 집을 형성하는 것이므로 사회를 개선 할 수 있다. 「교회는 친교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생활화하는 한해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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