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는 대희년에 들떠 있지 않은 듯 했다. 도시 곳곳이 파헤쳐졌고 그 때문에 교통이 조금 혼잡 한 것이 관광객들에게 조금 거슬릴 뿐 오히려 새로운 조형물이나 건물, 대형 건축 등의 사업이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이미 시작된 각종 공사들도 대희년 한해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워낙 오랜 도로에 해묵은 건물들이 많아 이미 십여년 전부터 필요했던 공사들을 큰 맘 먹고 하는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줄곧 이랬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는 마르코 발디니(45)씨가 희년 개막일인 지난해 12월 24일 붐비는 로마 시내에서 교통 혼잡에 걸린 채 말했다. 로마 토박이로 택시 경력 5년째인 그는 수년 째 계속되는 공사에 약간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로마인들에게서는 로마가 갖는 종교적 의미, 온 세계의 눈길이 집중되는 자기네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성당 입장표는 1년전 배포
대희년 개막의 분위기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야 찾아볼 수 있었다. 24일 오후가 되면서 광장에는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광장 귀퉁이마다 순례객들이 삼삼오오 가벼운 담요로 무릎을 덮고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순례자의 모습이다. 로마에서 가장 큰 광장, 성 베드로 대성전 앞에 펼쳐진 광장은 반원형 회랑에 4열의 도리아식 원주 284개가 웅장하게 서 있다. 그 위에는 140명의 성인상이 올라서서 순례자들을 끌어안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앙에는 서기 40년에 이집트에서 운반된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높이만 25.5m 무게가 무려 320톤에 달한다. 오벨리스크 앞에는 집 한 채 규모는 족히 될 거대한 성탄 구유가 만들어져 수백명의 순례자들이 기도를 바치고 그 옆에는 20m 가량 되는 커다란 성탄 트리가 불을 밝 혔다. 광장 양 옆으로 쌍둥이처럼 놓여진 분수도 밤새도록 물을 뿜었다. 우측 분수는 마데르노가 17세기에 만든 것이고 왼쪽 것은 베르니니에 의해 후에 복제된 것이다.
예식이 거행된 성 베드로 대성전은 각 시대 미술의 정수만을 모은 곳으로 묵은 때를 벗기는 등 새로 단장됐고 4000여개의 새 조명이 설치돼 역사의 현장에 함께 한 순례객들의 가슴을 벅차 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녁 7시가 넘어서면서 광장은 인파로 메워졌다. 이미 1년전 성당 입장표를 확보한 7천여명의 행운아들은 조금 더 게으름을 피워도 좋아서 8시까지만 성당에 도착하면 됐다. 광장에 마련된 좌석들 역시 입장표가 있어야 했다. 분수대 옆에는 혼잡을 피해 유모차가 여러 대씩 서 있었고 추위를 견디기 위해 아기를 안고 볼을 부비는 젊은 엄마들이 모여 있었다.
추기경·주교·외교사절 참석
이윽고 성탄 전야 미사를 1시간 앞둔 저녁 11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쪽으로 된 육중한 청 동 성문을 향한 역사적인 행렬을 시작했다. 성전 오른편 성문 앞에는 이미 추기경, 주교들과 전 례 관계자들, 바티칸 주재 외교사절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성가대가 시편 122장을 노래하 는 동안 성문에 이른 교황은 간략한 예식을 거행한 후 『정의의 문을 제게 열어주소서』하고 기도한 후 침묵 중에 계단을 올랐다.
연로한 교황은 조금 힘에 부친 듯 했으나 이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교황청 전례 관계자들이 전날 청동 문이 쉽게 열릴 수 있도록 약간의 기름칠을 해두었다. 성문이 완전히 열리자 성전 안에 불이 밝혀지고 자리잡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 광장을 메운 순례자들이 일제히 일어섰고 환호와 박수 소리가 파도치듯 온 광장을 휘감았다. 광장 양쪽으로 설치된 4대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성문을 열고 문에 손을 짚은 채 감동에 겨운 교황의 뒷모습이 성문과 함께 클로즈업됐다.
교황은 드디어 성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고 베르니니가 제작한 브론즈 「천개(天蓋)」로 덮인 교황 제단에 도착했다. 이어 부제가 성서와 교부의 말씀들로 짜여진 대희년 선포문을 장엄하게 노래했다.
『교회는 (성탄의) 은혜로운 기억을 되새기며 교회의 배필인 그리스도 강생 2000년을 기념하나이다. 이 희년은 주님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실 해이며, 자비와 은총의 해, 화해와 용서의 해, 구원과 평화의 해입니다. 인류 구원의 시작이신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자, 대희년의 시작을 기념하자』 미사가 이어졌고 은총의 해 대희년 개막식은 교황의 장엄 축복으로 막을 내렸다. 교황은 2001 년 1월 6일 다시 이 자리에서 성문을 닫아 희년을 마감하게 된다.
평신도 자선활동 활발
성문 개막식의 장엄하고 감격적인 순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대희년은 전체적으로 차분했다. 그 담담함이 이미 오래 전부터 대희년을 살아왔던 사람들 같다. 바티칸 바로 뒤편에서 묶고 있어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바라보며 잠을 깨던 기자는 어스름 동이 틀 때마다 든든하게 챙겨 입고 손을 맞잡은 채 어김없이 성당을 향하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특별하지 않지만 삶으로 구현된 대희년의 모습을 느꼈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개막식을 기대했던, 「덜 떨어진」 순례자였던 기자는 다소 지루해 보이기까지 한 로마 대희년의 또 다른 모습을 개막 하루 뒤 광장 한 귀퉁이에서 발견했다. 성탄 며칠 전부터 「보나딸레」(성탄 축하인사)를 외치며 순례자들에게 구걸했던 한 이탈리아 아기 엄마가 따끈한 파스타와 롤빵, 음료수를 대접받고 있었다. 로마의 4대 성당에서는 매일 500명분의 식사를 마련해 인근의 집시나 걸인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성 베드로 서클」이라는 평신도 젊은이 단체의 활동이다. 약 30년 전에 창설돼 기도와 노동과 희생을 모토로 수백명의 회원들이 복지시설들을 운영한다. 로마에서는 이와 유사한 자선 활동들, 특히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들이 상당수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듬뿍 받는 희년은 그 은총을 나누도록 요청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선물 받은 은총과 은혜는 사랑의 나눔을 통해 빛날 것이다. 그 나눔은 단지 대희년 동안에만 이뤄지는 것 이 아니라 일생 동안 이어지는 삶의 지향이 돼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 가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대희년은 시작됐고 앞으로 1년 남짓 계속된다. 성문 개막의 감격이 1년 내내 지속되는 가운데 삶의 변화와 쇄신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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