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차가 진입할 수 없는 부산역 2층 대합실 앞. 빨간 경승합차 한 대가 올라오자 노숙자들의 줄행렬이 시작된다.
매일 새벽 1시에서 4시 사이 부산역 근처 노숙자들에게 컵라면을 끓여주고 아픈 이들을 치료해주는 김현희(30세)씨. 늘 입는 빨간 남방과 자기 직장주인의 빨간 차 때문인지 노숙자들은 동생 같고, 딸 같고, 누나 같은 김씨를 「빨간 엄마」라고 부르며 따른다.
어느틈엔가 노숙자들도 자기들끼리 당번을 정해서 물을 끓이고, 라면을 나눠주고, 청소를 시작한다. 그 사이 김씨는 예전 간호사 경험을 되살려 대합실 의자에서 치료를 한다. 노숙자들은 작은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중증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기본적인 치료도 큰 도움이 된다.
김씨가 부산역에서 봉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 12월 2일. 친구를 마중하러 역에 나갔다가 얇은 셔츠 차림으로 떨고 있는 노숙자에게 자신의 잠바를 벗어 준 일이 있었다. 그때 『며칠밤 사이 역광장 근처에서 노숙자 4명이 동사했다』고 그 노숙자의 말은 김씨의 귓전을 떠날 줄 몰랐다.
당장 그날 밤부터 김씨는 역광장 한켠에서 컵라면을 끓여 50∼60명의 노숙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동사하기 가장 쉬운 시간은 새벽 1시부터 4시 사이예요. 그사이 따뜻한 국물이라도 먹으면 적어도 죽진 않을꺼란 생각으로 새벽에 나왔어요』
새벽에 노숙자들에게 라면을 끓여주러 간다고 할 때 주위의 반대도 심했다. 성격이 거친 사람이 많아 위험하다는 게 그 이유. 경찰은 『아가씨가 라면을 주니까 부산역 노숙자가 더 늘었다』며 『쓸데없는 짓 말고 돌아가라』고 설득했었다. 뿐만 아니었다. 일부 교회와 단체의 사탕발림에 실컷 일해주고 일당을 못받은 노숙자, 툭하면 도둑으로 몰리는 바람에 사람에 대해 의심만 늘어버린 노숙자들은 처음 김씨를 보더니 『우리를 어디에 이용하려고 온거냐』며 버너를 부수고 행패를 부렸다.
하지만 꿋꿋한 김씨 태도에 경찰도 일주일만에 김씨의 차가 2층 대합실 앞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역 측에서도 라면을 끓이고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전기불을 켜준다.
노숙자들이 지금의 어려운 형편에서 빨리 제자리를 찾길 누구보다 바라는 김씨에겐 절대 용납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자활을 위해서 술은 금물이라는 것. 그래서 김씨는 술을 마시고 오는 사람에게는 라면도 약도 주지 않는다. 노숙생활을 한 지 3개월째 되는 이현석(36·가명)씨는 『빨간 엄마는 우리 고민도 들어주고 야단도 쳐서, 술을 마시거나 싸우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며 『새벽이면 우리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들 같은 심정이 된다』고 말했다.
또 김씨는 매일 일간지와 생활정보지를 꼼꼼히 살펴 노숙자들에게 일자리를 알려준다. 반짝 지원하는 구호품보다 근본적으로 일자리를 찾는 게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 지금까지 김씨가 취직을 알선해준 노숙자들만 해도 5명이나 된다. 박원식(17·가명)군과 한영철 (20·가명)군은 고아원에서 나와 역주변을 방황했었다.
지금은 김씨의 알선으로 섬유공장에 취직해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직장에서 일하던 중 손가락을 다쳤지만 보상도 못받고 쫓겨난 오민기 (47가명)씨는 한 시민 덕분에 손가락 수술을 다시 받게 됐다. 그 사람은 역을 지나가다 김씨가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돕게 됐다고 한다.
김현희씨는 사진관에서 일하며 한달에 80만원을 받는다. 노숙자들에게 제공할 라면과 부탄가스, 약품 등을 사는데 드는 비용은 하루 3∼5만원 정도. 한달 월급을 몽땅 쏟아부어도 부족하다. 그나마도 사진관 차량을 이용하고, 숙식을 선배언니 집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돈이 한푼도 없는 날에도 김씨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라면도 없고 약을 살 돈도 없는 날엔 어김없이 주위사람들이 도와주곤 해요. 퇴근하다가 아무말 없이 만원짜리 몇장을 주머니에 넣어주시는 아저씨, 비닐 봉투 한가득 우유와 과일을 싸서 손에 쥐어주는 아주머니도 있어요. 며칠 전에는 라면이 다 떨어져 그냥 사람들 얼굴이라도 보고 오려고 마음먹었는데 우연히 알게된 한 성당 신자분이 주위 사람들과 함께 라면과 약품을 사주셨어요』. 이밖에도 김씨가 사용하는 휴대용 가스버너를 본 한 신자가 안전하고 큼직한 전기포트를 사줬다.
『평소 마더 데레사를 가장 존경했습니다. 이분들이 도와주시는 모습을 보니 나누지 못할 만큼 작은 것은 없고, 나눔은 또다른 나눔을 만든다는 것을 알았어요.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께 배운 것이 이런 게 아닐까요』. 종교, 인종, 국경 등을 떠나 단지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들 외면하는 거리의 노숙자들을 돌본 마더 데레사처럼 살고 싶다는 바램. 김씨는 이 바램을 밑거름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기 위해 교리 배울 준비를 하고 있다.
밤 10시에 퇴근해서 봉사를 하다보면 하루평균 수면시간이 3시간도 채 안된다. 늘 충혈된 눈으로 출근하지만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노숙자들을 돕고 싶다는 김씨. 그녀는 자식의 끼니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오늘도 어김없이 라면과 약품을 싣고 역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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