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 한국교회에 바라는 개인적인 소망을 적어 보라는 부탁을 받고 한참을 고민했다. 1월 16일자 신문에서는 장혁표 교수님이 주로 평신도에 관하여 소망을 표현하였기 에, 나는 사제들의 생활과 직무수행 방법에 대한 소망에 대하여 몇자 적어 보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었기 때문이다.
지난 4년 반 동안 인천교구에서 대의원회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평신도들의 발언을 듣는 것 외에도 각 분과에서 제출하는 문건을 읽으면서 사제들의 생활과 직무 수행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과 불만, 의견과 제안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평신도, 여성, 그리고 수도자들이 표현하는 그런 비판과 제안들이 결국 역사 흐름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고 시대의 징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한 비판과 제안들이 따지고 보면 아주 새로운 것도 아니지만 대의원회의는 그 표 현을 공개적으로 하도록 장을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것이다.
민주적 본당 운영
첫째로, 나는 앞으로 본당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사제들이 더이상 권위적 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고 민주적으로 행동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제들이 권위적이라는 불만과 비판은 줄기차게 제기되었던 것이고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할수록 민주적 운영에 대한 요망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본당공동체의 민주적 운영이라는 원칙을 반대하는 사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한국 사제들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실천에 있어서 사제들 사이에는 상당한 편차가 있을 것이다. 민주적으로 본당을 썩 잘 운영하는 사제가 있는가 하면 아직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사제가 아마도 있을 것이다.
민주적이라는 것은 사제가 본당에 관한 어떤 결정을 단독으로 하지 않고 항상 평신도들의 규합된 의견에 따라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목회장이나 사목위원의 선정, 건축물의 수리나 중대한 비품의 구입, 본당 전체에 관련된 행사계획 등에 대하여 신자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어떤 결정을 갑작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회의 안건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평신도들은 사제에게 반대하기를 꺼리고 침묵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침묵을 동 의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제는 반대의견도 자유롭게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신자 대다수의 의견이 다른 경우에는 사제는 자신의 의견을 버릴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본당의 민주적 운영은 평신도들의 식견의 훌륭함을 인정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방법이고 동시에 실책을 미연에 방지하고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리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사제가 자신의 식견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겸손을 실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투명한 본당재정
둘째로, 사제는 본당의 재정을 아주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집행하고 사용하는데 최선을 다하기를 바란다. 본당의 자금은 사제의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봉헌한 것이라는 점을부인할 사제는 없을 것이다. 마치 본당의 자금이 사제 개인의 것인냥 임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은 처사이다.
본당 자금의 투명하고 공개적인 사용을 위해서 사제는 사무장으로 하여금 장부를 철저히 기록하도록 지시하고 감독하며 또한 재정장부를 신자 대표들이 언제든지 자주 검토하도록 허용할 뿐 아니라 요구해야 한다. 인천교구의 경험으로 보면, 주임사제가 사목회장이나 재정분과에게 장부를 반드시 검토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으면 검토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는 만큼 주임사제의 요구는 분명하고 강력해야 한다.
재정의 보다 투명하고 공개적인 집행을 위해서는 매달 사목회의에서 재정현황을 보고 하고 검토하도록 조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개중에는 본당의 모든 지출을 하기 전에 해당 분과장이 먼저 결재하라고 요구하는 주임사제도 있다. 그래서 직장과 가정 생활로 바쁜데 어떻게 매일 매일의 본당 지출결의서에 결재를 하느냐고 비명을 지르는 재정분과장도 보았다. 나아가서 전문가나 능력있는 신자로 하여금 매년 한번 정도로 본당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철저하게 감사해서 보고서를 만드는 전통을 세우는 것도 필 요할 것이다. 인천교구의 예를 보면, 대부분의 본당 주임사제들이 잘 하고 있고 다른 교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혹시 그렇지 못한 본당이 있다면 아주 투명하고 철저한 방법이 도입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조치가 사제의 위신과 권위의 실추나 상실을 가져오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사제는 교회 공동체를 훌륭하게 건설하고 빈틈없이 운영할 책임을 지고 있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여성의 지위 향상 문제
셋째로, 본당 운영에 있어서 여성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지위를 높여주는 다양한 조치들이 새 천년에는 도입되기를 바란다.
여성에게 사제직을 금지하는 것이 중대한 논쟁거리가 되어 있는데, 그 문제를 각 본당에서 해결할 수 없다 해도 다른 식으로 여성의 지위를 높여주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여성의 지위 향상 문제는 물론 가톨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고 한국 전체의 문제라는 것도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가톨릭 교회 내의 차별은 더욱 심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여성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조치를 방해하는 것은 사제의 의식구조나 습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한국의 남성 신자와 심지어는 여성 신자들의 의식구조와 심성에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것을 해결하는데 사제의 힘만으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사제의 습성과 의식구조가 중대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보자는 바램을 표현하고자한다. 최근 몇 년 동안에 한국의 일반 여성 뿐 아니라 수녀들의 의식구조도 비슷하 게 변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제들은 수녀들, 특히 본당에서 함께 일하는 수녀들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지위를 높여주는데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말하자면, 기득권자인 남성은 변화에 저항하고 느리게 변해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새롭게 느끼고 권리를 찾으려는 여성은 빨리 변하는 것이다. 수녀들의 의견조사서를 읽어 보면 당장 파업을 하거나 전쟁을 걸어 올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왜 성당의 궂은 일만 시키고 여성에게는 사목회장이나 사목위원 지위를 주지 않느냐? 왜 꼭 미사보를 쓰라는 것이고 주일 제2독서만 하라는 것이냐? 왜 여성에게는 미사복사와 성체분배권을 금하는 것이냐? 왜 사제는 본당 수녀를 종처럼 대우하는 것이냐? 등의 항변이 있다.
기도하는 사제
넷째로, 나는 한국의 사제들이 행동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를 바란다. 한국의 사제들은 항상 너무나 바쁘고 할 일이 많다는 것 은 사실이다. 특히 인천교구에는 사제가 전국에서 제일 부족하여 신자가 5000명이 넘는 여러 개의 본당에서는 사제가 한 분만이 사목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바쁘고 피곤하다. 그러다 보니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행하지만 다른 기도와 묵상에 시간을 부족하게 할애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하는 일도 많고 가는 곳도 많아서 거의 누구나 너무나 분주하고 허둥댄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 같다.
현대인들의 행동주의적 습성이 강하고 본당의 일이 많다고 해도, 사제들이 모두 덩달아 행동주의적 생활 양식에 빠지고 동시에 묵상과 개인기도에 시간을 너무나 적게 할애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제들은 성사를 집행하고 신자들을 만나고 건강을 위해서 운동과 등산 등을 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중요하고 하나도 등한시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 해도, 충분한 묵상과 개인기도의 시간을 짤라버리는 것은 행동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한 생활 양식은 결국엔 나머지 사제 생활에도 문제를 끌고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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