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를 구하시는 하느님이시니…불쌍히 여기심을 주여 돌아 보소서…나를 살펴 주소서 조재환 수사(스테파노75). 검은 수도복에 깔끔하게 빗은 흰머리가 한층 정갈 함을 더한다. 편안한 얼굴에 천진한 미소를 항상 머금는 조수사는 14살에 입회해 어언 62년째 수도생활을 하는 노(老)수사다.
새벽 5시. 조수사는 여느 새벽처럼 아침기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른바 종지기. 이젠 차임벨이 예전의 종탑에 걸린 종을 대신하지만 조수사는 종소리 듣는 것이 무척이나 즐겁다. 은은히 울리는 종소리는 모든 시름을 잊게 해주고 맑은 명상에 빠져들게 한다.
성무일도와 묵상에 이어 6시 30분 아침미사가 봉헌된다. 미사후 조수사는 수도자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간다. 1952년 왜관수도원 창설 당시부터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주방 소임을 담당해 온 조수사. 수도자들의 건강을 챙기는 일에 한치의 게으름도 용납하지 않는다. 한가지 예를 들면 조수사가 만드는 치이즈는 어느 유럽산 보다 맛이나 향이 빼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신부들도 본토 보다 맛이 낫다고 한다. 50여년간 주방 소임을 훌륭하게 수행해 낸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수사가 담당한 소임들은 이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러나 수도원내에서 꼭 필요 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덕원수도원 시절엔 책만드는 제본실, 구두방, 병실에서, 왜관수도원에선 73년에서 75년까지 3년동안 청지원자 선생수사직을 맡은 것 말고는 오로지 주방에서 소임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것들은 수도원내에서도 오로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지칭되는 소임들이다.
어느새 오전 11시 45분. 낮기도가 봉헌되는 시간이다. 서둘러 점심식사 준비를 끝낸 조수사는 성당으로 향한다. 홀로가 아닌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조수사는 이렇게 공동으로 기도할 때가 가장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베네딕도회 생활은 한 수도원 안에서 아빠스와 규칙 아래 함께 하느님을 찾는 공동 수도생활로서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생활을 이상(理想)으로 한다. 베네딕도회 생활을 이루고 있는 세가지 핵심적인 요소는 기도, 노동, 성서독서이다. 따라서 이 생활은 한 마디로 이러한 세가지 핵심적인 요소로 이어지는 매일의 단순한 삶안에서 서원을 통해 구체화되는 자아포기의 부단한 실천으로 하느님을 찾는 생활이라 할 수 있다. 베네딕도회의 서원은 정주 수도자답게 생활하는 것 그리고 순명이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이 세가지 서원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일에 자신의 전 삶을 투신한다.
조수사의 외가는 외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을 가진 유서깊은 구교우 집안. 아버지와 어머니도 40리 길을 걸어 주일미사에 참례할 정도로 성실한 신자였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14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수도회에 입회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고. 1938년 함경도 덕원수도원에 입회한 조수사는 일제치하에서 군대에 징발되기도 했으며, 1949년 공산당에 의해 덕원수도원이 폐쇄되자 월남(越南), 서울 잠원동에 있는 고아수용시설인 성심원에서 복지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6.25로 인해 종신서원을 제때에 받지못하고 산속에 숨어 지내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한 조수사. 그는 1955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종신서원을 받게 된다.
떳떳하게 한평생 주님을 섬기려 노력했습니다. 한점 부끄럼 없이. 수도자란 사실을 망각하지 않으려 애써다 보니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조수사의 이러한 떳떳함은 많은 후배 수도자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려 나선 후배들이 참으로 기특합니다. 기쁨이 가득한 생활이 지속되길 바라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시련을 이겨내길 기원합니다 조수사가 후배 수도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조수사는 유혹이 있거나 권태감이들땐 처음 입회할 때의 마음을 생각해 보라고 후배 수사들에게 권유한다.
친구여, 당신은 무엇때문에 왔습니까(마태 26, 50). 이 말은 베르나르도 성인의 모토 이며 베네딕도회 규칙서 60장에 나오는 말이다. 조수사는 어려울 때마다 이 말을 되새기며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한다.
예수님도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같이 수도자들이 보다 젊은나이에 성덕을 쌓으려 열심히 노력할 때 우리 교회는 희망적인 모습들을 많이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새 오후 6시. 저녁기도를 봉헌하고 묵상을 한다. 저녁식사를 마친 수도자들은 잠 시 휴식후 8시부터 끝기도를 바친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도라는 정신을 오늘 하루는 얼마나 실천했는지 철저히 반성한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지 말고 주님 말씀대로 살게 도와 주시고 세상 안에서 당신의 증거자가 되게 하소서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덕원수도원이 복구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조수사.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소임을 수행하게 도와주신 하느님께 찬미드리며, 죽는 날까지떳떳함을 간직하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조수사의 진지한 말속에서 새로운 천년을맞는 이 시대의 수도자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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