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다 태워서 결국 재로 남는 장작들을 보면 이것이 진정 사랑이구나 싶어요』라며 몇 시간째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 이석순 원장(엘리사벳·65)의 이마엔 구슬땀이 맺힌다.
올들어 가장 추웠다는 대한(大寒). 여느 때처럼 새벽 5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시작되는 하루지만 이원장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진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할머니들의 목 욕날이기 때문이다. 중풍, 치매걸린 할머니들을 씻기고 나서 거동이 가능한 할머니들 은 읍내 목욕탕에 데려다 준다. 오후 3시 찬바람에 할머니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맘졸 이며 약속시간에 맞춰 봉고차를 몰고 나간다.
오후 4시부터 다시 시작되는 아궁이에 불때기. 이원장은 하루 5시간 이상을 보일러실에서 보낸다. 장작을 때면 한달에 200여만원 정도 경비가 절감되기 때문. 직접 나무를 해다가 땔감으로 썼는데, 요즘은 자원봉사자들이 건축폐자재인 나무를 구해다줘서 땔감걱정은 한시름 놓았다 한다.
저녁식사 후 기도시간. 할머니들은 거실에 모여 「은인들을 위하여, 북한동포를 위하여, 기도를 부탁한 이들을 위하여」 저마다의 지향을 가지고 기도를 바친 후 한 할머니의 장구로 시작해 함께 춤추고 여흥을 즐기면서 하루를 마치곤 한다.
깨끗하게 정돈된 정원, 한켠의 성모상, 햇살이 내려앉는 창가에 가지런히 놓여진 화분들. 경남 양산시 웅상읍에 자리잡은 무료양로원 성 요셉의 집은 언듯 보면 어느 부자 집 별장같다.
건설업을 하는 이의 도움으로 97년 마련된 이 집은 이원장이 직접 설계한 작품. 문짝 하나하나까지 할머니들을 위한 이원장의 배려와 사랑이 곳곳에 배어있다. 하지만 건물외양만 보고 발길을 돌리는 후원자도 많았다.
이렇게 넓은 방에 할머니 한 두분 밖에 지내지 않느냐고 방문객들이 집을 둘러보며 말할 때, 이원장은 가슴이 아프다. 왜 사람들은 양로원의 할머니들이 수용소처럼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남은 시간만이라도 편안하게 잘 지내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라고 말하는 이원장에게서는 친어머니 대하듯 하는 딸의 심정이 드러난다.
현재 요셉의 집에서는 25명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남편에게 구타당해 정신이 나가버린 40대 아주머니부터 93세 최고령 할머니까지. 이 집은 생활보호대상자인 할머니들에게 나오는 15만원의 정부지원금과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외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밭일을 해서 찬거리를 마련하는 등 이원장은 막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1936년 2남5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그는 밭일로 바쁜 부모 대신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할머니에 대한 정이 유난히 컸던 이원장은 초등학교 소풍길에 땔감을 줍던 인근 양로원 할머니와의 만남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한다.
흰쌀밥 한그릇 먹는 것이 소원이라는 그 할머니의 말이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그후로 돈을 벌어 불쌍한 할머니들을 위한 양로원을 짓겠다는 꿈을 간직하게 됐다.
52년 부산사범학교를 다니던 이원장은 여자가 무슨 공부냐는 아버지의 반대와 6.25로 인해 학업을 포기했다. 하지만 양로사업에 대한 꿈만은 버릴 수 없었다.
고아원 일을 도우며 봉사활동을 하던 이원장은 독일인인 하 안또니오 신부를 만나게 됐다. 우연한 만남을 통해 엘리사벳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2년 남짓 수도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하지만 늘 마음에 두고 있던 양로사업을 위해 65년 독일행을 택했다. 양로원 시설도 배우고 돈도 벌기 위해 쾰른시립양로원에 간호보조원으로 지원한 것.
12년간 독일생활동안 이원장은 밤마다 자신이 지을 양로원을 설계하면서 할머니들과 함께 살 그날을 기다리며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랠 수 있었다.
쓰레기통에 삶은 달걀, 고기, 채소 같은 것들이 버려지는 것을 볼 때마다 죽 한그릇 못먹는 한국의 할머니들을 생각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드디어 꿈을 이루기 위해 귀국하려 할 때, 독일의 친구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며 왜 사서 고생을 하러가느냐고 만류했다.
77년 전재산 4000만원을 들여 부산 부곡동에 「초원의 집」을 개원하던 날 이원장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4년뒤 그곳은 친구에게 맡기고, 더 어려운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양산 웅상읍에서 다시 맨몸으로 시작했다. 다행히 독일 친구들의 후원과 여러 도움의 손길로 양로원을 꾸려갈 수 있었다. 기반이 잡히자 독일에서의 후원은 북한동포를 위해 쓰도록 배려했고 이원장은 지금도 요셉의 집보다 더 어려운 곳으로 후원금을 돌리고 있다.
93년 가톨릭봉사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원장은 자신에게 돌려지는 봉사한다, 대단하다는 식의 시선들을 이해할 수 없다. 땔감을 구하고 불을 지피고, 할머니들을 보살피 며 함께 지내는 시간 시간이 그저 기쁘고 행복한데…. 오히려 할머니들이 저에게 많 은 사랑을 베풀어 주세요. 눈먼 할머니께서 방청소도 하시고, 딸 생각하듯 조금이라도도와주시려고 애쓰시지요
결혼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바치며 24년간 100여명의 할머니들과 함께 살아온 이원장. 지난 날들을 돌이키며 모든 것이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오늘도 이원장은 요셉의 집에 살고 계신 할머니들과 마당 성모상 앞에 뼈가 묻혀있는 9명의 할머니들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할머니 아침이 시작됐어요. 고통없는 곳에서 잘 살고 계시지요. 오늘도 저와 하느님 안에 함께 해주세요
그리고 할머니들 방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때러 나간다. 자신을 모두 태워 재가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의 얼굴은 마치 성모님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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