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어키, 우리에게는 한국동란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함께 피를 흘린 혈맹국 정도로만 알고있는 것이 고작인 나라.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2000년전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에서 발흥하여 한때 중앙 아시아 스텝지대에서 시베리아의 캄차카 반도에 이르는 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했던 투르크(돌궐족)의 후예로서 이후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건설했던 나라이자 동서문명의 교차지역 으로 히타이트 문명, 헬라 문명, 비잔틴 문명, 이슬람 문명을 꽃피웠던 곳이다.
또한 터어키는 아브라함의 고향이자 그 민족인 투르크족은 노아의 아들 야벳의 둘째 아들 마곡의 후손이며 히타이트족은 가나안의 둘째아들 헷의 자손인 성서민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터어키는 사도 바울로 전도여행의 주무대 이자 이를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이 온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는 곳으로 구원의 보편성을 보여주고 나타내는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터어키는 교회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1차부터 8차까지의 공의회가 열린 지역으로 교회의 교리가 거의 체계화 되고 다듬어진 곳이다.
이렇듯 신앙적으로도 중요한 터어키가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생소한 것은 터어키 역사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터어키는 국민 99%가 수니파 이슬람을 믿고있는 투르크 족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에서 적대내지는 경쟁관계에 있었고 자신들과 혈연상으로나 문화적으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한 셀주크와 오스만 제국 건설 과정에서 타도해야할 대상, 이슬람화해야 할 대상이었던 그리스인의 헬라문명과 로마인의 비잔틴 문명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짙은 것이다.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 당시 400여년간 터어키의 식민지였다.
그래서 터어키 역사책에는 헬라와 비잔틴에 대해 다소 기술해 놓긴 했지만 사실상 기원전 2천년 전의 히타이트 시대로부터 훌쩍 뛰어넘어 기원후 1071년 이후 국토의 97%에 이르는 아나톨리아 지방(소 아시아) 중심으로 기술해놓고 있어 소아시아 지역 역사 이해에 공백을 남기고 있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이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콘스탄티노플(현지명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의 역사이다. 532년에 기공해 537년 완공한 성 소피아 성당은 짧은 기간에 지어진 최대규모의 건축물로 완공후 1000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으며 지금도 5번째로 큰 성당이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고난 후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개조돼 사용되어오다 1935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1000년은 하느님을 섬기고 500년은 알라를 섬긴 셈이다. 제국의 주인이 바뀌면서 성당의 운명도 바뀌어 성당안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들이 회덧칠로 가리워지고 1000년의 역사가 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덧칠한 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숨어있던 모자이크가 드러 나면서 이제는 옛 영광을 간직한 박제가 되고 말았다. 성 소피아 성당 안에서 느끼는 것은 그 웅장함이나 빼어난 건축술이 아니라 성당의 역사가 보여주는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이었고 결국 신앙은 외형이 아니라 삶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의 세월이야 어찌됐건 이렇게 거대한 성 소피아 성당이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바울로 사도의 그 위대한 전도여행이 한알의 밀알이 되었을 것이다.
성베드로 석굴성당
터어키의 동남쪽 끝, 안티오키아. 바울로 사도 전도의 거점이자 세계 만방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한 곳이지만 바울로와 교부들의 유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고 베드로 바오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모여 미사를 드렸다는 전설이 깃든 성베드로 석굴성당만이 남아 사도가 활기차게 걸어다녔을 안티오키아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석굴성당 앞에 펼쳐져있는 안티오키아 전경을 보며 바울로 사도 당시 신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면 이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다른 헬라계 유다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들었을까(여기서 처음 그리스도인이란 표현이 사용된다)를 생각하다 바울로 사도가 1차 전도 여행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름을 사울로에서 바울로로 바꾸는 것을 기억했다.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유다계식 이름보다 로마식 이름이 전교에 용이하 다고 여긴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 그분을 위해서라면 권력도 명예도 쓰레기 처럼 여긴 사도의 신앙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아무런 신앙의 유적도 없는 오늘의 안티오키아에서도 바울로 사도는 순례객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참된 신앙의 유산은 돌부스러기가 아니라 그 삶이라는 것을 가슴에 담았다. 가빠도기아 유적 안티오키아를 뒤로하고 사도의 고향 다르소를 거쳐 바울로가 걸어 넘었을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가빠도기아로 향했다. 가빠도기아는 바울로 사도가 3차 전도여행시 들렀던 지역으로 베드로전서에 의하면 1세기 말엽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곳이다.(1베드 1,1) 가빠도기아에 도착하면 우선 그 독특한 지형에 넋을 놓게되는데 이곳 지질은 본래 사암지대였으나 화산이 터지면서 용암이 위를 덮었다. 따라서 사암을 파내기만 하면 훌륭한 주거공간이 형성되기 때문에 초기교회 시절 많은 신앙인들이 박해자들을 피해 이곳에서 생활을 했다.
가빠도기아 유적 중에는 지하도시와 수도원 집성촌인 괴레메 골짜기가 유명하다. 로마의 카타꼼베가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이들의 도시라면 가빠도 기아의 지하도시는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 이들, 곧 산자들의 도시이다. 지하도시는 30개나 되는데 지하 800미터까지 파내려가면서 주거 공간과 성당 등을 만들어 생활했다. 참된 삶을 살기 위해 지상의 편안한 삶을 포기한 이들의 흔적들을 짚어 내려갈수록 그 신앙에 놀라워 하며 그들은 암울한 이곳 생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생각하다 작지만 최선을 다해 꾸민 성당과 공동 부엌 등을 보면서 섬김과 나눔의 생활이야 말로 그들을 살게한 에너지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웃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라는 주님의 계명을 떠올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울로 대성당 유적
가빠도기아에서 바울로가 1, 2차 여행시 들렀던 이고니온(현재명 콘야) 을 거쳐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현지명 얄바츠)에 이르면 넓은 산 언덕 위에 펼쳐진 옛 도시의 폐허 속에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울로 대성당 유적이 나온다. 이 성당은 당시 유다인 회당 시나고그 위에 세워졌고 터어키에서 유다교 회당 터위에 성당을 세운 사례는 여기 밖에 없기 때문에 안식일에 회당 에서 선교 연설을 했다는 사도행전(13, 14~52)의 기록에 비춰볼 때 바울로 사도가 이곳에서 유다인 동족에게 전도한 바로 그 자리다. 비록 부서진 돌무더기로 버려져 있지만 사도 바울로의 신앙의 열정을 증거해주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이외에도 지나온 바울로 사도의 모든 전교지들의 신앙의 흔적은 땅의 주인이 바뀌고 신앙의 형태가 바뀜에 따라 폐허화 됐지만 의구한 산천 만큼 사도 바울로가 남긴 그 위대한 신앙의 유산은 2천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순례객들에게도 자신의 신앙을 반성케하고 선교열정에 피를 끓게 만들기 충분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