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55년만에 남북정상이 화해의 악수를 나누고 이산 가족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 외국인 선교사들은 그들과 함께 기뻐하며 가슴 한켠에 또 다른 희망을 키웠다. 전쟁이 남긴 이념의 장막으로 북녘 땅에서의 선교활동이 끊어지고 아무런 죄없이 죽음의 길을 수없이 오갔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과거의 아픔을 모두 잊기로 했다. 50년전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난 한국 땅에 남은 마지막 생존자들. 바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과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도자들인 비투스 수사(90), 아르놀드 신부(95), 까리따스 수녀(88), 벨트뷔나 수녀(86), 아사시아 수녀(84)는 그날을 다시한번 회고해보지만 이젠 모든 일들을 아련한 기억 속에 남기기로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 소련군의 점령으로 덕원, 원산 땅의 학교와 수도원, 성당은 모두 폐쇄되고 더 이상의 선교 활동은 불가능했다. 그러면서 외국인 수도자와 한국인 수도자 들은 모두 체포됐다. 체포된 후 한국인 수도자들은 강제 해산됐고 그후 피난길에서 죽음을 맞거나 행방불명되는 등 뿔뿔이 흩어졌으며 외국인 수도자들은 평양에 이어 「죽음의 수용소」인 옥사독 수용소에서 죄없는 죄수의 삶을 살아야했다. 『처음에는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몰랐어요. 50년 10월 폭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면서 뭔가 큰일이 터진줄 알았죠. 자꾸만 총성이 잦아지더니 23일 인민군 장교가 피난을 가야한다며 급하게 떠난 길이 바로 죽음의 행진이 됐지요』
옥사독에서 만포로, 만포에서 압록강 건너 관문리 수용소로, 여기서 다시 옥사독으로 이어지는 피난길. 벨트뷔나 수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바로 그 죽음의 행렬을 떠올렸다. 50년 10월 23일부터 51년 1월 17일까지 86일간의 피난길. 이 죽음의 행진은 쓰디쓴 고통의 나날이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 이며 다 떨어진 누더기를 몸에 걸치고 보잘 것 없는 보따리를 메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비참한 대열 속에서 외국인 수도자와 신부들은 하나 둘씩 죽어갔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주검을 묻으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기도했다.
『끔찍했어요. 피난 길에 먹을 것이 없어 전부 다들 영양실조에 걸렸고 음식이 맞지않아 설사를 안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수도복은 입지도 못하고 속치마 하나만 입고 있었죠. 밤이나 낮 이나…』평생을 농아를 위해 살아온 까리따스 수녀(관련기사 7면)는 배고픔이 무엇보다 힘들었지만 가마니 몇장 깔린 것이 전부인 비좁은 수용소에서 수녀, 수사, 신부들은 늘 고통 중에서도 서로 아픔을 나누고 기도하며 서로에게 힘이 돼주었다고 회고했다. 오늘도 50년전의 일들을 생각하며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비투스 수사는 당시 죽음을 맞이할 뻔했다. 굶주리고 있는 공동체 생각에 오두막에 쌓여있는 옥수수 한통을 몰래 가져오다가 들켜 「도둑」「거짓말쟁이」「개」라는 소리를 들으며 웃옷을 벗긴채 춥고 숨막히는 독방이 갇혀 열흘을 보냈다.
『너무 추워서 죽는줄 알았죠. 온기라고는 느낄 수가 없었고 몸이 점점 굳어지면서 정신을 잃었어요. 얼마전 세상을 떠난 디오메데스 수녀가 아니었다면 오늘 이렇게 살아있지 못했을 거예요』 86일 간의 죽음의 행진에 이어 다시 옥사독 수용소로 이송돼 3년을 더 살다가 54년 1월 본국으로 송환된 이들은 그 당시의 고통과 그들의 핍박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그들이 우리들에게 「한국사람들 피 빨아먹고 사는 개새끼들」이라고 욕설을 퍼부어대고 참을 수 없는 수모와 힘겨운 노동, 피난 그리고 형제들의 죽음을 주었지만 그들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들 모두 하느님의 한 형제들이고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무섭고 지겨운 멍에로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선교의 부푼 꿈을 안고 사랑을 쏟았던 한국 땅과 신자들을 떠난다는 것이 힘들었던 이들. 그래서 이 땅에 돌아와 수도공동체를 만들었던 이들의 기도는 오늘에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제2의 고향 원산, 덕원 땅에 선교의 발판이 다시 마련되기를 바라며. 까리따스 수녀는 나머지 생존자들과 북녘 땅에 뼈를 묻은 수도 가족들의 염원을 대신해서 말한다. 『이젠 늙고 힘들어 내조국 독일은 갈 수 없지만 통일이 된다면 꼭 원산을 가고 싶어요. 그곳에서 생을 마치더라도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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