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는 제2대 교구장 박석희 주교의 선종으로 교구 발전사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99년말 교세통계표에 따르면 현재 안동교구의 교세는 31개 본당 84개 공소에 신자수 43437명 복음화율 4.6%로 전국 15개 교구에서 가장 열악한 상황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안동교구의 이러한 교세 상황은 지형적 사회적 상황에 따른 것이다. 경상북도 북부 11개 시군의 농촌지역을 사목하고 있는 안동교구는 지형적으로 산간벽지에 위치해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 등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대형 생산시설 기반이 없는 지역에 위치해 도시 교구들 보다 선교가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안동교구의 사목지역은 전통적으로 유교와 불교세가 강한 지역으로서 생소한 이국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쉽지않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안동교구가 1969년 설립된 직후부터 밀어닥친 산업화의 영향으로 인한 심각한 이농현상은 교구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데 설립당시 250만이던 지역인구가 99년 말에는 93만으로 줄어들 정도로 이농현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회변화 속에서 신자들의 이향현상도 같은 비율로 진행돼 두드러질 만큼의 신자 수 증가가 어려운 실정인 것이다. 이같은 교구의 외적 성장을 저해하는 사회적 상황들은 설립 단계에서부터의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한국동란 이후 당시 26개 본당 중 20개 본당이 완전히 파괴 되었거나 시급히복구해야할 상황에 있었던 대구대교구는 이후 활발한 대 사회활동과 구호활동 등으로 신자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따라서 이들을 수용하고 사목할 많은 본당과 사목자를 필요로 한 대구대교구는 1953년 왜관 감목대리구 1954년 경남 감목 대리구를설립하는 한편 1958년에는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 사제들을 초빙하여 안동 감목대리구를 설립하고 경북북부 지방의 사목을 위임했다. 이중 경남 감목대리구는 57년 부산교구로 안동 감목대리구는 69년 안동교구로 설립됐는데 이 과정에서 안동 감목대리구 관할이던 영일과 포항 지역은 대구대교구로 넘어가고 대구대 교구 지역인 의성과 왜관 감목대리구 지역인 상주와 문경지방이 안동교구로 편입됐다.
이후 교구 설립 직후 시작된 경상도 지방의 산업화가 경북 남부와 경남 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안동교구는 산업화 과정의 최대 피해지역인 농촌지역만을 관할지역으로 안게된 것이다. 자신의 이러한 지리적 사회적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안동교구는 교구 설정이후 현재까지 교구 사목을 하는 과정에서 농민사목에 역점을 두어 농촌개발 사업을 시작으로 농민 의식화 운동 등을 꾸준히 실시해왔다.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가난한 이들과 농민들을 위한 이들의 권익 대변에 나선 안동교구의 이러한 사목활동은 자연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자연히 지역민들과 함께 생활하려는 자세로 교구를 이끌어왔다.
이러한 사목의 결과로 비록 신자 수는 4만이 조금 넘는 적은 수 이지만 엄청난 이농현상에도 불구하고 설립 당시 2만이던 신자 수가 배이상 증가한것은 신자들의 복음정신 만큼은 어느 대형 교구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그런 뜻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교구설정 25주년 기념 신앙대회에서 좬안동교구는 여건으로는 가장 가난한 교구에 속하지만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되기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가장 앞서있는 모범적인 교구좭라고 평하기도 했다.
제1대 교구장 두봉 주교의 사목방침과 교구의 현실을 잘알고 있던 고 박석희 주교는 지난 90년 교구장 취임과 더불어 이러한 교구 사목방침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회복지 분야를 대폭 강화하는 한편 복음정신에 입각해 사회적으로 활동할 교회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복음정신, 교회 영성에 기초할 때 비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 박주교의 생각이었다. 박주교는 『영성의 기초가 다져져야 신자들이 주체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2천년대 복음화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이러한 생각 속에 박주교는 매주 사목방문을 하면서 신자들에게 복음정신을 역설하면서 올바른 공동체 건설을 가르쳐왔고 신자 들이 신앙의 뿌리를 찾을 수 있도록 교구 내 마원 우곡 한실 등지의 성지조성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임 교구장들의 사목의지를 볼 때 안동교구는 1969년 교구 설정 이후 현재까지 가난한 농촌 지역민들과 함께 하면서 인간 구원과 농민 구원의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교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안동교구의 다음 교구장은 어느 누가 되든지 간에 가난한 이들과 농민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생명문화 건설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목자여야 할 것이다.
고 박석희 주교는 몇 년 전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농촌의 현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서 『일반인 뿐만 아니라 우리교구에서 일하려고 온 사목자나 수도자들도 농촌의 현실을 너무나 감상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긴 한 마디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농촌교구로 오면서 농사일이 아닌 것을 찾는 것이 문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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