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님께서 떠나시던 날, 여느 때처럼 월요일 아침미사를 수녀원에서 봉헌하셨다. 공교롭게도 그날 수련 자매들한테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강의를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주교님께서 저희들한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잖아요』하며 일깨워 달라는 당부도 하셨다고 한다. 그러시고는 이렇게 황망히 떠나실 줄이야…. 주교님! 지금은 지나간 일들에 대한 기억이 다시금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하루느 노래가 부르고 싶어 교구청 뒷밭에 갔더니 당신은 흰셔츠 차림으로 허리 굽혀 배추벌레를 잡고 계셨지요. 『내가 한동안 안 와 봤더니 벌레가 많이 갉아먹었다』며 벌레가 어디에 잘 숨어있는지 가르쳐 주시던 당신의 모습. 올 여름 교구청 식구 모두가 감자 캐던 날 당신도 땀 흘리시며 함께 하셨던 모습. 새참으로 나온 미숫가루를 마시며 하늘도 보고, 『누가 제일 큰 감자를 캤고, 올 농사 작황은 어떻고…』하는 갖가지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자리에 없는 이들도 하나 하나 챙기시던 당신. 평화의 인사 나눌 때 보여주신 은은한 미소, 사랑의 시선.
주교님, 지금도 당신의 모습이 그대로 제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께서 보여주신 생전의 모습도 그러하셨지만 뒷 모습도 아름다우십니다. 지금은 하느님 곁에 계시면서 주님 뜻을 찾는 우리 안동교구를 위해, 당신께서 돌보시던 양떼에게 필요한 은총을 전구하고 계실 줄로 알고 믿습니다. 이렇게 믿으며 마음을 다져도 슬픔은 아직 매 한가지입니다. 당신께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인내하시며 속으로 속으로 삭히셨는지, 모든 것을 품어 안으시고 떠난 당신의 사랑을 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올 주교님, 이제는 시름 놓으시고 주님 품에서 평화의 안식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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