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한 독일인 수녀가 낯선 땅을 밟은지도 60여년이 흘렀다. 단지 주님만 믿고 따르겠다는 일념 하나로 먼 바닷길을 건너왔다. 이제 그에게는 「농아들의 어머니」허애덕(까리따스·88·사진) 수녀란 이름이 남아있다. 39년 원산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 시절, 한 농아 처녀와의 만남이 허수녀를 농아 선교의 길로 첫발을 들이게 했다. 서투른 수화로 교리를 가르치며 농아들의 아픔을 나눌 수 있었다.
『꿈에 그리던 첫 서원과 수도 생활도 잠시였어요. 6.25가 발발하자 평양 인민교화소로 끌려갔다 옥사독이라는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했지요』허수녀는 소위 「죽음의 행진」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었다. 본국에서 잠시 지낸 후 5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 돈암동본당에서 활동하면서 우연히 북한에서 교리를 가르친 농아자들을 만났다. 반가움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며 또한번 눈물을 흘렸다.
토굴 속에서 사는 것조차 쫓겨나야했던 그들을 보며 허수녀는 농아자들을 위한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61년 서울 미아3동에 농아자활원을 설립하고, 미8군 골프장을 닦는 일을 농아자들에게 맡겨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왔다. 허수녀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참 좋은 시간들이었죠. 국수공장을 할 때가 제일 기억에 남는군요』하며 추억에 잠겼다. 7년간 하루 5~8000여명 분의 국수를 생산해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인근 근로자 식당에 공급했다. 『삶의 활기를 준 국수공장이 문을 닫자 또다시 농아 자활원은 침체에 빠졌죠』
허수녀는 독일에 도움을 청하러갔다가 당시 유행하던 바르비 인형을 만들어보기로 생각했다. 손재주가 있던 농아들이 만든 인형은 금새 국내외서 인기를 끌었다. 『농아자들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여기저기 일거리들을 찾아다녔죠』 허수녀는 농아자들의 생활기반을 다지는 것외에도 농아자들을 위한 「애화학교」 , 또 농아 노인들을 위한 경로원인 「성요셉의 집」도 마련했다. 허수녀가 「농아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은 단지 이러한 외적인 업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특별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내 이웃의 한 사람으로 농아자들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것이다. 허수녀는 올해 1월 서원 6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10월 22일 오전 11시 서울 애화학교 대강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미수 (米壽) 축하미사를 봉헌한다.
이날 농아자들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온 허수녀의 삶을 담은 평전 봉정식이 있다.「힘을 주셨기에 사랑할 수 있었지요」라는 제목으로 허수녀의 일대기를 집약하고 있다. 아직 어떤 내용의 책인지도 모른다는 허수녀는 단지 이렇게 말한다. 『농아자들은 나와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책을 내는 것도 모두 농아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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