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겨울,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불안과 좌절, 벌써 몇 년째 우리는 나 자신부터, 이웃이, 사회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 IMF 위기를 간신히 헤쳐 나온 듯했지만 또 이어지는 터널에 허탈감을 느낀다. 함께 힘을 모으면 넘어서지 못할 산도 아니겠건만 왜 이렇게 억울하다는 생각이 날까.
새벽 5시. 조미진(데레사·64)씨는 주섬주섬 솜바지를 입는다. 요 며칠 새벽 공기가 전에 없이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심해진 관절염 때문인 듯 싶다. 옷가게에 도착해 셔터를 올리고 찬밥 한 덩이를 따끈한 물에 말아 마시고는 잠깐 눈을 감아보지만 몸이 전 같지 않게 고단하다. 종일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임대료도 못 댈 지경이다. 『그래도 이거 해서 세 놈 대학까지 보냈어. 하루에 한 장을 팔고 단돈 천원을 벌어도 나와야지 별 수 있나』
대학을 다니다가 가정 형편 때문에 그만 둔 김준수(34)씨. 카페트를 파는 백화점 매장에 취직했건만 부도가 나면서 업체가 문을 닫는다. 내년 1월이면 실업자 신세. 다른데 자리가 있기는 하지만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할 것이 뻔하다. 사흘째 잠을 설치고 있다. 아이가 조금 크면 놀이방에 맡기고 집사람도 조금은 벌이가 가능하겠지. 아내에게 면목이 없다. 친구 하나도 2년 전 직장을 잃고 1년을 놀고 난 후 신경쇠약으로 취업은 생각도 못한다. 잘나가던 은행원 친구도 「풍전등화」에 「추풍낙엽」이다. 교원 정년에 걸려 이태전 퇴직한 친구 아버님은 주식에 발을 들였다가 수천만원을 날리고 상심해 병석에 누웠다. 명동성당 앞에서 눈에 불을 켜고 농성중인 노조원들 심사가 남의 일 같지 않다.
2000년 겨울, 성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행복한 사람은 전부 어디 있을까. 모두 화난 얼굴로 생존을 위해 치달린다. 한 땀 한 땀 뜨개질하듯 행복을 수놓아가던 성실한 사람들은 수백억, 수천억을 한 손에 떡주무르듯 하는 사람들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허탈하다. 하기야 이런 저런 걱정 모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천 만원씩 하는 밍크 코트 사는 사람들이야 백원 한 장 아끼려고 이리저리 할인점 찾아 다니는 아줌마들 심정을 어찌 알겠는가. 공전에 공전을 거듭하면서 자기들 세비는 잔뜩 올려 놓는 국회의원들의 뻔뻔함에도 사람들은 이제 무반응이다. 하지만 속으로 쌓이는 울화는 어찌할까. 어쩌다 한번 지하철을 타고 서민을 만나네 어쩌네 하는 낯 간지러운 생색내기에는 먹은 것이 거꾸로 올라온다.
신문 방송에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한 동반 자살, 촉탁 자살이 보도돼 우리를 아연케 했다. 자살이 어찌 이번 뿐이랴. 실직한 가장이 온 가족과 함께 동반 자살한게 한두건인가. 실직에 이어진 가정 파탄으로 아이들은 자포자기. 사회나 학교는 이미 훨씬 오래 전에 그 본래의 기능을 포기했다. 아이 기르기를 포기한 부모는 너무나 쉽게 집을 떠났고 아이들은 버려졌다. 『애들이 날 버렸어. 죽는 줄 알았어…』저 먹고 살기 힘든 자녀들은 가장 먼저 부모를 버린다.
성탄이다. 올 겨울은 따뜻하지만 가슴 속은 시리도록 서늘하다. 한 줌 손에 염원을 담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따뜻한 집에서 새 옷으로 차려 입힌 아이들을 데리고 한해를 무사히 지낸 고마움에 구유를 예쁘게 꾸며 두고 화려 하게 장식한 성당으로 향하는가? 아니면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 외아들이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의 그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가.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희망을 갖는다. 절망에 떨어진 인간이 「성탄」이 있어 구원으로 들어올려졌듯이 어떤 참담함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꿈꾸기 때문이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집을 나서 찬밥 한 덩이 말아먹고 험한 세상을 살아내는 우리들 이웃은 그저 세상을 원망하지만은 않는다. 『지금보다 더한 때도 있었는데 뭐. 내 맘대로 안되는게 세상이야. 남한테 해코지 안하고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오겠지』더 이상은 이 평범한 현자(賢者)들이 고단한 삶,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는 좋은 나라가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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