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의 일곱교회
사도 바울로의 위대한 전도여행지를 따라 순례하다보면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를 만나게 된다. 요한 묵시록은 자신을 신으로 자처하면서 황제 숭배를 강요하며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도미시아누스 황제 말기에 씌여진 것으로 이러한 박해 상황 속에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쓰여졌다.
묵시록의 저자로 알려진 사도요한은 당시 에페소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 서부지역의 대주교로서 불모의 바위섬 파트모스에 유배 당해 있으면서 자신과 같이 박해를 받고 있는 신자들에게 세상의 주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므로 흔들리지말고 신앙을 굳건히 지키라고 일곱교회에 편지를 써보낸 것이다.
따라서 유다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일곱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친숙한 구약성서에 기록된 역사와 상징 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일곱교회가 위치한 로마의 아시아 속주지역은 바울로와 그 제자들의 주 선교무대였다. 바울로는 제3차 전도여행에서 에페소 에서 27개월 간이나 머물며 대대적으로 선교했고 제자 에바프라가 골로사이 라오디게이아 히에라폴리스 등지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요한은 바울로 이후 에페소(현지명=셀주크)에 왔는데 이는 새롭게 생겨나는 이단들에 대처하고 바울로가 했던 선교활동을 더욱 공고히 하고 확장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후 소아시아 서부지역에는 요한 성당 으로 불린 성당은 많아도 바울로 성당으로 불린 성당은 하나도 없다. 일곱교회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에페소는 당시 소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로 로마제국 안에서 자치권을 갖는 자유 도시였다. 이 에페소에는 바울로 사도에 의해 신앙이 전래되는데 바울로가 『문이 활짝 열렸다』고 말할 만큼 전교가 잘되던 지역이었다. 사도는 처음에는 개종자들을 중심으로 나중에는 이방인들에게까지 선교활동을 확장시키게되는데 그의 선교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급증함과 반대로 아르테미스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던 은장이들의 수입이 감소하자 은장이 데메드리오의 사주로 폭동이 일어난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바울로 사도가 이 곳을 떠나게 되고 바울로 이후 요한이 이지역에서 40년 동안 바울로 사도의 활동을 뒤 잇는다. 사도 바울로가 곤욕을 치루던 노천극장은 지금도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바울로를 모함하던 그때의 고함이 들리는 듯한다. 노천극장 밑으로는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혔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데 그리스도교가 로마 국교가 됨으로써 인기를 잃고 결국은 에페소의 성 요한 성당과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지을 때 신전의 석재들이 건축자재로 사용돼 지금은 돌기둥 하나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요한은 파트모스섬에서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 에페소에서 죽었는데 그의 무덤 위에 조그만 경당이 지어졌고 후에 유스티아누수 황제 때 거대한 성 요한 대성당이 세워졌으나 지금은 폐허 상태로 방치돼있고 요한의 무덤만이 그 폐허 속에서 순례객들을 반긴다.
노천극장에서 항구쪽으로 100여미터를 따라 내려가면 5세기 초엽에 지은 성모성당이 나오는데 그 터는 사도 요한이 성모님과 함께 예루 살렘에서 옮겨와 살던 곳이라고 한다. 이 성당은 교회 사상 성모께 봉헌 된 맨 첫번째 성당인데 431년 이곳에서 공의회가 열려 네스토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성모께 하느님의 어머니란 칭호를 사용할 것을 결의 한 곳이기도 하다. 에페소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세워진 당시 교회 중 가장 큰 교회였으며 이곳에서부터 신앙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금은 뷜뷜산 언덕의 성모 마리아의 집만이 안스럽게 남아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는 처지로 전락했는데 왜 그렇게 됐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찾아 보았다. 『나는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저 버렸다는 것이다』
요한은 이곳 에페소를 중심으로 후계자들을 훈련 시키는데 그의 첫번째 제자가 일곱교회 중의 하나인 스미르나(현지명=이즈미르)의 첫번째 주교 폴리까르포 성인이다. 폴리카르포 성인은 155년경 화형을 당하는데 총독이 그리스도를 저주 하면 놓아 보내 주겠다고 하자 성인은 『그분을 섬긴지가 86년이지만 제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제와서 어찌 그를 배신할수 있단 말이요』라고 대답하고 순교했다. 지금도 터어키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인 이즈미르 시내에는 1690년에 지었다는 폴리카르포 순교 기념 대주교좌 성당이 있다. 에페소와 베르가모(현지명=베르가마), 티아디라(현지명=아키사라), 사르디스(현지명=사르트), 필라델피아(현지명=알라쉐히르), 라오디게 이아(현지명=라오디게이아) 등의 교회는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 지워진 성당들, 그것도 무너져 형체도 찾아 볼수 없는 폐허만이 존재한다. 십자가가 새겨진 돌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어 그나마 한때 성전 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는 황량한 폐허. 어디에 쓰였을지도 모르는 돌들 위에 제단을 꾸미고 미사를 봉헌하면서 일곱교회의 운명이 한결같음을 생각하면서 뜨겁지도 차지도 않게 되어 버린 나의 신앙,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잃어버린 지금의 모습대로 살아 간다면 우리 인생의 끝도 저리 허망하지 않을까하는 회한이 끝없이 밀려 왔다.
아테네와 고린토
이제 터어키를 뒤로하고 사도 바울로의 여행길을 따라 그리스로 향했다. 바울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 그리스로 건너가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에 교회를 창설하고 아테네에서 선교했으나 실패하고 그리스 남부 지역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인 고린토로 내려가 18개월간 머물며 큰 교회를 세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제1호인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테네. 이미 기원전 432년에 이러한 문명을 이룩했던 아테네 사람들은 그야말로 문화 시민이었고 그들에게 변방에서 온 볼품없는 한사람의 생소한 이야기가 먹혀들어갈 리가 없었다.
바울로는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 아래쪽에 있는 나지막한 바위 언덕 아레오파고에서 설교했는데 그 아래쪽은 아고라라고 하는 장터로 이곳은 시장의 기능 뿐만 아니라 정치적 모임도 잦았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이 철학을 논하기도 했던 아테네 시민 일상생활의 중심지였다. 날마다 모여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고 입씨름을 벌이던 그들에게 인간의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바울로의 구원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이다. 신앙 안에서 인간의 지혜란 것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이며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아레오파고 였던 셈이다.
바울로는 아테네에서 선교에 실패하고 고린토로 가 큰 교회를 세운다. 고대 고린토는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로서 총독부가 있었던 곳이며 그리스인 로마인 유다인 동방인 등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사는 도시였고 자연 종교도 매우 다양했다. 또한 아프로디테 여신전에는 매음을 하던 여제사장이 1000명이 넘었다는 타락의 도시이기도했다. 바울로 사도는 교회창립을 마무리하고 고린토를 떠났다가 3차전도여행 중에 에페소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고린토 교회의 소식을 전해 듣고 편지를 쓰게 되는데 이것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바울로가 고린토인들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는 것은 당시 고린토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인 후, 당시만 하더라도 교리 등이 체계화되지 않은 교회 형편에서 하느님 경배의 절차 및 신앙생활의 규범 등을 두고 갖가지 분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로는 예수사건을 사랑의 관점에서 풀이하며 하나하나 대답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원천이시며 예수께서는 목숨을 바쳐 그 사랑을 이룩하 셨고(로마 5,8)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의 영원성을 예수의 부활로써 드러 내셨으므로(2고린 5,14)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대답한다. 형식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바울로 사도는 그 유명한 사랑의 송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 그리고 이 말은 사도 바울로의 전도여행지를 뒤따르며 순례하는 이들 에게 주는 명쾌한 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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