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이미 끝난 오후 3시, 운동장 한쪽에서 함께 놀다 미술학원 때문에 먼저 집에 가야된다며 일어서는 상호가 근택(가명·초교2) 이는 괜스레 미워진다. 교문을 향해 잰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상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근택이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만다.
『할머니, 나도 학원 보내줘!』『아직 철이 안 나서, 쯧쯧…』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온 근택이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몇 차례 다짐을 해놓고선 다시 예의 투정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오고 만다. 학원은커녕 끼니마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몸져누운 아빠와 집을 나가버린 엄마대신 자신을 키우느라 더 늙어 보이는 할머니에게 괜한 투정을 부려본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 매주 며칠씩 파출부 일을 나가는 할머니가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끼니를 해결하기가 녹록치 않다. 더구나 연료비 등으로 목돈(?)이 들어가는 겨울이면 굶는 날이 늘어 난다는 것을 근택이는 길지 않은 삶을 통해 알고 있다.
예쁜데다 성격마저 밝아 겉으로 봐선 남부럽지 않은 부모를 둔 것처럼 보이는 초등학교 1학년인 은주(가명)는 어린 나이에 벌써 세상을 제 나이보다 많이 알아버리고 말았다.
중풍을 앓고 있는 할머니의 병시중을 들고 있는 산동네 할아버지댁에 맡겨진 지 2년, IMF 이후로는 생활이 더 팍팍해져 아침을 거르는 날이 훨씬 많아졌다. 어른스럽기까지 한 은주는 쌀이 떨어질 때쯤이면 학교 가서 할 일이 있다며 이른 등교길에 나선다. 냉기가 가시지 않은 덩그런 교실에 움츠리고 앉아 속으로 눈물지은 게 한두번이 아니다.
농약을 항상 준비해두고 산다는 할아버지의 속내를 은주가 모르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 뿐이다. 『정 견디기 힘들어지면 이 농약 마시고 모진 목숨 끊을 거야. 어린것마저 굶기며 무슨 낯으로 살아. 휴…』 2평 남짓한 쪽방 2개를 돌아보며 긴 한숨을 내쉬는 은주 할아버지에게선 희망없는 삶의 아픔이 절절히 전해져왔다.
밥, 최소한의 행복할 권리
학교에서 나오는 급식이나 복지시설에서 나눠주는 도시락으로 하루의 허기를 근근히 지우는 근택이, 은주와 같은 아이들을 보듬어 안는 곳이 늘어만 가고 있다.
지난 1989년 서울 봉천동 산비탈에 보금자리를 튼 「참사랑사회 복지센터(옛 꽃망울글방)」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설립 초기만 하더라도 12명에 지나지 않던 아이들이 오히려 지금은 60여명 으로 늘어나 있다. IMF가 한창일 때는 100여명으로까지 늘어 그야말로 「콩나물글방」이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알게 모르게 배고픔의 고통에 어린이다움을 빼앗기고 있다.
막노동이나 잡일로 근근히 끼니를 이어가는 극빈층이나 한계계층이 많은 지역일수록 사정은 더해 이들 가정의 어린이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내팽개쳐지기 일쑤다. 더구나 IMF사태 이후 가정경제를 책임진 가장들의 실직과 이에 따른 생활고로 자녀양육을 포기하는 부모가 늘어나면서 이른바 「IMF불황 고아」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현실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또 다른 아픔의 현주소다.
최근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올 6월말까지 전국에서 발생한 요보호아동수는 6353명으로 지난해 상반기의 5725명에 비해 11%가량 늘었다. 이 가운데 부모가 자녀를 길거리에 버린 기아 수는 884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0%나 증가했다.
최소한의 행복할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 그 아픔은 당해보지 않은 이로서는 상상키 어려운 법이다. 하물며 세상을 깨치지도 못한 어린이들이고서야.
그런 가운데 다가온 성탄이 이들에겐 남의 일만 같다. 벌써부터 교실 한 쪽에선 성탄 카드를 자랑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나 친구들과 점심도 함께 먹을 수 없는 아이들이고 보면 또래무리에 쉬 끼지 못하는 소외감 등에서 오는 마음의 상처가 가슴에 큰 굴곡을 남겨 놓기도 한다.
이 시대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사회가 던져 주는 아픔의 크기는 당장 수치로도 드러난다. IMF체제 이전인 97년 1만1000명에 불과했던 결식아동의 수는 1998년에는 13만90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경기가 회복세로 들어섰다는 올해도 전체 취학아동의 3%에 달하는 23만명의 어린이가 끼니를 거르고 있다는 게 교육부의 통계다. 이같은 수치는 그러나 학교에 다니지 않는 미취학 아동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어서 실제 그늘에서 배고픔에 떨고 있는 어린이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나 이런 아동들의 경우 수치심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있어 숨은 아픔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나마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아동들의 경우는 은총이라고 할만하다고 일선 관계자들은 전한다.
『…그동안 도시락을 싸주셔서 저는 가장 힘들었던 날들을 편히 지낼 수가 있었고 가정에도 많은 도움과 안정을 주셨습니다. … 그 때는 수술을 핑계로 그랬지만 사실은 매우 어려운 형편에 아이들 도시락 반찬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간장 한병 사먹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차비 때문에 평일미사도 다니지 못했으니까요. 다른 모든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아이들을 먹이지 못하는 제 마음은 참으로 비참했답니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에 보내온 현이(가명) 엄마의 편지 중)
『엄마, 지금은 형편 때문에 도움을 받고 살고 있지만 이 다음에 커서 제가 갚아줄게요』(현이) 엄마와 서로에게 용기가 돼준 현이는 매일 배달되던 「도시락」하나로 새로운 삶의 기운을 차린 셈이다.
IMF 이후 교회는 한마음이 돼 사랑의 씨앗을 사회의 그늘진 곳에 뿌렸다. 서울대교구를 필두로 전국적으로 확산된'금 모으기운동' 부터 인천교구가 극빈 실업세대를 위해 펼친 「사랑의 쌀」모으기 운동, 각 교구가 너나 할 것 없이 펼쳐온 쌀 나누기, 김장 지원, 사회복지회나 복지관 등 시설과 병원 등을 중심으로 펼쳐진 중식 지원….
나눔의 손길은 교회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곳곳으로 흘러들었지만 아직도 많은 곳이 사랑의 불모지로 남아 있다. 근택이나 은주와 같은 어린이들이 현이처럼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먼저 이들의 아픔을 자신의 책임으로 통감하는 자세부터 필요하다.
이와 함께 보다 근본적인 국가 사회복지제도의 대안을 함께 모색 하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려는 사랑의 불씨가 모두의 마음에 번지도록 나서는 마음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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