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병마(病魔)도 애절한 혈육의 정을 꺽지 못했다. 패혈증과 고혈압으로 4년째 투병중인 운보(雲甫) 김기창(베드로·88) 화백이 오매불망 그리던 북의 막내동생 기만(71)씨와 12월 1일 병실에서 극적인 만남을 가졌다.
『...........』
50년만에 이뤄진 '운보 형제' 의 상봉은 이처럼 침묵 속에 시작됐다. 오후 3시30분께 총총걸음으로 삼성서울병원 1902호에 들어선 동생 기만씨는 병상에 있던 형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형인데…」 듬직했던 예전 모습은 오간데없고 호흡기에 의존한채 누워있는 형의 애처로운 모습에 기만씨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운보 화백은 흐릿한 눈속으로 반세기전에 헤어졌던 동생을 금새 알아보자 무언가를 말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노(老)화백은 동생을 만난 감격이 억제되지 않는듯 호수를 꽂아 놓은 목으로 연신 거친 숨소리만 몰아쉬었다.
『개선 장군이 되어 제가 돌아왔습니다』 기만씨는 청각장애까지 앓고 있는 형을 위해 수첩에다 이렇게 적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그러자 지칠대로 지친 형의 얼굴이 모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형, 기만이예요. 형이 그렇게 예뻐하던 아우입니다.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이제야 찾아와 죄송해요』 기만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기만씨는 서울 시립미술연구소에서 일하던 1951년 누나 기옥(74)씨와 함께 월북했다. 하지만 장남이었던 기창 화백은 처가가 있는 군산으로 피난길을 떠나면서 두 동생과 헤어지게 됐다. 유달리 이 두 동생을 아꼈던 운보는 이후 그때 더 적극적으로 말렸어야 했다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또 가끔 자녀들에게 두 동생과의 행복했던 시절을 얘기하며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했다고.
그토록 보고싶던 막내 동생이 백발이 돼서 돌아왔다. 평생을 가슴에 묻어두었던 두 동생. 운보 화백은 그동안의 한을 모두 내뱉으며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형과 동생이 손을 맞잡고 울음을 토해내 주위 가족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조선화(한국화) 전공화가로 북한에서 「공훈화가」인 기만씨는 이날 상봉에서 「태양을 따르는 한마음」이란 6폭짜리 자신의 그림을 형에게 전했다. 운보 선생도 평소 가장 아끼던 작품 「승무」(1971년작)와 전작도록(全作圖錄) 1질을 동생에게 선물했다.
이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극적인 상봉을 지켜본 김화백의 셋째딸 김영 수녀(아나윔·수원교구 안산 사랑의 선교수녀회 원장)는 『두분이 살아 생전 만나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재회가 마련돼 너무나 감격스럽다』면서 『아버님께서 평소 동생들과의 이별로 그렇게 가슴 아파하셨는데 잠시나마 그 맺힌 한을 풀게돼 정말 주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특히 동생 기만씨는 이날 기옥씨의 편지도 함께 형에게 전달했다. 여기에는 『그리운 오빠 너무나 보고싶다. 통일되면 우리 만날테니까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라』 등등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형, 다시 만날때까지 반드시 반드시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누나 기옥이와 조카들도 보시지요. 저하고 꼭 약속하셔야 해요』
아들 김완씨는 『어제까지만해도 의식이 거의 없어 상봉이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거짓말같이 오늘 아침부터 의식이 돌아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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