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은 항상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시기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담고 있는 천국,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본다.
천국은 있을까?
이 세상의 종말이 오면 열리는 또 다른 세상으로서 「천국」은 있을까?
지난 97년 실시했던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갤럽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천주교 신자의 73%가 「천국이 존재한다」라고 응답했다. 세상의 종말이 올 때 신의 심판을 받는 다고 대답한 사람은 천주교 신자의 경우 48.6%, 아니라고 답한 사람이 30.2%였다. 94년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신자들은 천국에 대해 「믿는다」가 52.3%, 「어느 정도 믿는다」가 37.%로 긍정적인 반응이 89.4%에 달했다.
올해 불교 조계종 포교원이 전국 중고생 3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 종교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들의 경우 천국이나 극락을 믿는다는 질문은 41.6%에 그쳤다. 여기서도 개신교 신자들이 가장 높은 긍정 반응(53.1%)를 보였고 다음이 천주교(51.6%), 불교도(38.6%)의 순이다. 이는 97년 갤럽 조사에서 성인들이 응답한 비율보다 훨씬 낮은 수치이다. 한편 갤럽 조사에서는 「천국이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절반이 넘는 56.1%에 이르렀다.
잔치.겨자씨에 비유
『천국,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묻고 싶어한다. 하지만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이것이다」라고 설명하지 않고 항상 『무엇과 같다』라고 비유로 말한다. 예수는 천국을 종종 여러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잔치(마태 11, 1~10 루가 14, 12, 24) 혹은 겨자씨(루가 18, 18~19)로 비유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볼 수 있는 어떤 제도와 법, 체제를 갖춘 국가가 아니며 어느 지리적인 장소와 특정한 연도에 세워질 물리적인 왕국도 아니다. 천국이 세상 바깥에 위치해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는 피안적 장소로 오랫동안 이해돼 왔지만 오늘날 천국은 하느님이 착한 영혼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둔 특정 장소로 파악 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천국의 반대 의미를 지니는 '지옥' 역시 죄인 들을 벌하기 위해 마련된 무시무시한 형벌의 장소라고 파악되지는 않는다. 이미 3, 4세기 교부시대 이후 하느님의 사랑에 비추어볼 때 지옥의 '영원한 불' 은 그 사랑에 모순된다는 의문이 제기됐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
그러면 과연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천국,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일상적인 오해는 그것이 『지금 여기에』있지 않고 미래에 도달할 것이라는 소위 「종말론적 유보」이다. 세상 바깥에서 미래의 「시간」에 닥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무한한 존재로서 하느님의 「나라」는 시공으로 파악되고 확인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무한한 사랑의 영역을 말한다. 사랑과 친교가 완성된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됐다.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하고 죽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천국은 시작됐다. 그리고 한 사람이 사랑을 위해 겨자씨 같은 작은 선택을 할 때 이미 거기서 천국은 시작된다.
하지만 이 시작은 아직 완성에 이르지 않았으며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충만하게 하고 친교를 이룰 때 완성에 이를 것 이라는 것이 오늘날 천국에 대한 마땅한 설명이 될 것이다. 천국을 가공할 세상 종말과 인류의 대환란 후에 닥치는 종말론적 사고로 파악 하는 것은 자칫 우리를 기복신앙으로 이끌기 쉽다.
천국으로의 초대
천국으로의 초대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세상 끝날에 오기 때문에 내일 결단을 내려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을 미루는 사람은 불행하고(마태 24, 24~51 참조), 어리석으니(마태 25, 1~13 참조), 늘 『깨어 있으라』(마르 13, 33~37)고 당부한다. 이미 시작된 나라로서 천국이 완성에 이르도록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애덕을 실천해야 하며 이는 종말에 올 피안의 세계로서 천국을 위해 내일로 미뤄도 좋은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천국관(觀)의 변천
「천국」에 대한 이미지와 표상은 다양하다. 고대 셈족은 우주를 3층 구조의 집이라 여겨 천국인 맨 위층과 인간이 사는 지상층, 그리고 열등한 신과 죽은 자들이 사는 지하 등 3개 층이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여기서 삶의 위치가 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예수 시대 유다인들 중 사두가이파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 멸한다고 주장한 반면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었다. 에세네파는 육체가 죽은 뒤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초대교회에서 천국, 「하느님 나라」는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종말론적 실재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일원이 되고 개인적으로 착하게 삶으로써 생전의 행업에 따라 심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보상을 받는 다고 생각했다.
교부시대에 이레네오는 천국이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왕국으로 풍요로운 물질세계의 회복으로 보았다. 아우구스티노는 완전한 영의 세계로 영혼 들이 하느님을 직접 뵙는 기쁨을 누리는 곳이라고 믿었다. 중세에는 성서의 새 예루살렘과 같은 영원한 도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곳, 그리스도와 사랑의 결합을 이루는 곳 등 세 가지 사상을 중심으로 하며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상에서의 탁덕의 양에 따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근대에서 하느님 나라는 신학의 핵심 주제에서 밀려났으나 18세기를 거쳐 19세기 역사철학에서 많은 논의가 이뤄졌다.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세계사의 종착점이자 의미이다. 이러한 이해는 역설적으로 맑스주의의 이상 사회 사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상적인 사회가 인간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사상이 19세기말까지 지배적 이었으나 20세기 들어서 현세 지향적인 하느님 나라 이해는 후퇴했고 신학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종말론적 목적으로 보는 견해가 밀려났다. 현대에 이르러 천국 개념 논쟁은 사라지는 추세로 하느님 개념이 다양한 만큼 천국 역시 공통된 하나의 개념을 만들기는 어렵다.
다만 천국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신비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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