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과거사 반성 문건인 「쇄신과 화해」의 발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참회 예식의 거행이 교회력으로 새 천년이 시작되는 대림 첫 주에 이뤄진 것은 한국교회가 새롭게 태어나도록 노력 하겠다는 주교단의 강력한 의지의 표시로 보인다.
과거를 반성하는 행위는 미래를 준비한다는 측면에 오히려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2000년 대희년 선포 칙서인 「강생의 신비」는 「기억의 정화」를 백성들이 희년의 특별한 은총을 더욱 더 열렬하게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표지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과거의 잘못을 역사적이고 신학적으로 새로이 평가함으로써 불미스런 유산으로 남아있는 온갖 형태의 폭력과 증오로부터 개인과 공동체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는 하는 것은 끊임없는 쇄신과 회개가 필요한 그리스도의 교회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데에 몇 가지 고려할 점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함에 있어서는 흠이 없지만 교회의 자녀들은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신학적으로 흠없는 교회의 충실함과 그 자녀인 평신도와 성직자들의 나약함을 구별한다. 즉 『자신의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는 교회는 거룩하면서도 동시에 정화 해야 하며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한가지 중요한 고려 사항은 앞서 간 이들의 잘못을 과연 이 시대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반성의 대상이 놓여진 시대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오늘날의 양심으로 판단하는 것은 오류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서 과거사의 반성은 매우 정밀한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이 필요하게 되며 신중한 자세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실제적인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정화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을 수 없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가톨릭교회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고백하고 쇄신과 화해의 길을 걷는 것이다.
'쇄신과 화해' 무엇을 담았나
「쇄신과 화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용서 청원과 유사한 형태로 구성돼 있다. 교황은 지난 3월 용서 청원 예식에서 모두 7가지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했으며 이번에 발표된 한국교회의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역시 7개항의 죄 고백을 담고 있다. 또 교황 역시 한 가지 잘못이 끝날 때마다 용서와 자비를 청하고 있으며 「쇄신과 화해」도 마찬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만 「쇄신과 화해」는 당초 역사신학위원회의 구상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작성됐다. 원래는 병인양요, 일제강점시대 독립운동 외면 또는 제재, 신사참배 허용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나 최종 확정 단계에서 구체 사안들은 빠지게 됐다. 이는 앞서 언급한 역사적 및 신학적 평가의 어려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7개항 중에서 앞 부분의 3개항은 박해시대와 개항기,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를 각각 역사적으로 다룬 것이다. 1항과 2항은 신앙의 자유, 교회의 수호를 위해 외세에 의존하거나 일제 식민지 통치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때로는 민족적인 입장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신자들을 단죄한데 대한 고백이다. 병인양요, 대박청래 문제, 안중근 사건 등이 그 구체적인 예로 평가될 수 있다.
3항은 분단 상황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투철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다.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비극적 상황을 야기시켰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상흔은 계속되고 있다. 교회가 그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복음의 메시지와 민족의 염원에 바탕을 둔 활동을 펼쳐왔는가에 대한 반성과 고백이다.
4항부터는 분야별로 정리된 것으로 사회 안에 상존한 갈등,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에 부족했으며 윤리 도덕이 무너지고 공동선을 존중하는 사회 풍조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음을 반성하고 있다.
6항은 특별히 봉사자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잃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으로 주목을 끈다. 특히 성직자들의 권위주의나 외형적 성장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풍조에 대해 깊은 성찰을 나누고 있다. 마지막 7항은 다종교, 다문화 사회인 우리 나라 안에서 타종교에 대한 충분한 존중과 이해가 이뤄지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새 천년, 새 교회
근본적으로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는 것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이며 다짐이다. 그것은 결코 누구의 잘잘못을 가려 탓하려는 것이 아니며 신비체로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양심을 성찰하고 기억을 정화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쇄신을 향한 주교단의 강력한 의지 표명의 가치를 깊이 되새기고 작게는 개인의 과오로부터 가정, 단체, 본당, 교구까지 각자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양심을 성찰하고 과오를 반성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반성 내용
▶외국의 부당한 압력에 편승
▶일제통치 아래서 민족의 고통 외면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소극적
▶차별받는 사람들 인권과 복지 증진 노력 부족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만드는 데 열성 미흡
▶사회의 도덕·윤리적 귀감되지 못한 성직자
▶타종교 정신·문화적 가치와 사회·윤리적인 선 이해 불충분
■ 확정까지의 결과
●작년 5월까지 5차례 회의서 의견 수렴
●올 3월 12일 교황 용서 청원 후 본격화
●체계화 위해 역사신학위, 소위원회 구성
●추계 주교회의서 초안 검토 수정, 보완
●11월 9~10일 임시총회서 최종 확정
●12월 3일 화해예식 통해 발표
◆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 전문
“주님, 저희 잘못을 용서하소서”
대희년과 함께 새 천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면서 새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자신을 정화하는 자세가 요청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도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 주는 정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제삼천년기」 33항) 이라고 하시면서 교회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참회하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완수하신 구원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 신앙으로 결합된 형제 자매로서,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함께 고백하고 참회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참회를 바탕으로 자신을 쇄신하면서 민족과 화해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이들의 대열에 함께하려 합니다.
1. 우리 교회는, 세계 정세에 어둡던 박해 시대에, 외세에 힘입어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지키고자 한 적도 있었으며, 서구 문화를 받아 들이는 과정에서 문화적 갈등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고통과 상처를 준 여러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외국의 부당한 압력에 편승하기도 하였습니다.
2.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3. 우리 교회는 광복 이후 전개된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빚어진 분단 상황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홀히 한 점을 반성하고 이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마음 아파합니다.
4. 우리 교회는 우리 사회가 지닌 지역과 계층,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 하는 데나 장애인, 외국인 근로자 등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인권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노력도 부족하였음을 반성합니다.
5. 우리 교회는 집단 이기주의, 도덕적 해이와 부정 부패 등이 팽배한 사회 풍조 속에서 하느님께 창조된 모든 이가 올바른 가치와 도덕을 바탕으로 서로 이해하며 더불어 살아가도록 이끄는 데에 미흡하였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올바른 양심으로 살아가도록 충분히 이끌지 못하였습니다.
6. 우리 교회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 45) 고 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그대로 따르지 못한 때가 많았습니다. 때때로 우리 성직자들도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귀감이 되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빠지거나 외적 성장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등 세상 풍조를 따르는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7. 우리 교회는 다종교 사회인 우리 나라 안에서 다른 종교가 지닌 정신 문화적 가치와 사회 윤리적 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잘못도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렇듯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아울러 교회의 무관심과 방관 그리고 잘못으로 상처받은 분들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우리는 참회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선의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2000년 12월 3일, 대림 첫 주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